Chaotic Blue Hole

우주력 444년 4월 4일. 레니핀 현지시각 09:24.
레니핀 위성 궤도, AE 우주군 레니핀 파견함대 제3함대 기함 브레딘 브릿지.

"메일즈 격침!"

"제길, 왜 튀어나가선! 전열 흐트러트리지 말라고 해!"

"라저!"

"4함대에서 입전! 준비가 끝났답니다! 아, 1함대도 준비 완료!"

"좋아! 분함대 1번부터 4번까지, 포격을 계속하면서 산개! 포진이 끝나는 대로 보고해!"

"라저!"

3함대 사령관은 서서히 간격을 벌리며 멀어지는 분함대 전함들과, 동시에 후방에서 접근하고 있는 1함대와 4함대의 함선들을 보면서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긴장감, 안도감, 그리고 불안감이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긴장, 이제 돌파구가 곧 생긴다는 안도, 그리고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거기까지 생각한 사령관은 머리를 붕붕 흔들며 마지막 생각을 날려버렸다.

"썩을, 희망만 가져도 모자랄 판에 암울한 전망을 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분함대 포진 완료! 1함대와 4함대도 배치 종료했습니다!"

" 함대간 통신망 완전 개방!"

사령관의 지시에 모든 통신기능이 개방되며, 레니핀에 파견된 모든 우주 함대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 전방의 스크린에 그토록 기다리던 문자가 투영되었다.

[Fire]

"포격 개시!"

포진한 3개 함대, 거기에 소속된 모든 전함의 주포가 단 한곳을 향해 빛을 토해냈다. 위성궤도 방위의 거점 역할을 하던 대형 괴수가 그 빛에 휩쓸리며 형체를 잃었지만, 빛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지상을 향해 돌진했다. 성층권에 떠 있던 가디언마저 격파한 빛의 다발은 그대로 지면에 내리 꽂혔다.

"성공! 성공입니다! 포격 중심부에서 반경 50km 괴수 전멸!"

오퍼레이터들의 환성 속에서,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3개 함대가 전속력으로 튀어나왔다. 방금 포격을 가한 함선들을 지나친 새로운 전함들은 방금 만들어진 돌파구를 향해, 지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궤도 방위용 괴수들이 다시 모여들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격 재개! 놈들을 막아라!"

"동력로가 과열돼서 주포는 못 씁니다!"

"미사일이든 뭐든 좋으니 막아! 돌입이 막히면 헛수고다!"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통로와 그 통로를 달려나가는 전함들의 주위로 또다시 빛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개의 빛줄기가 지면을 달리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빛과, 적색과 청색이 뒤섞인 빛. 두개의 빛이 충돌할 때마다 그 여파로 지면이 패이고 바위가 깨져 날아다녔지만, 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거기에 영향을 받을 상대들도 없었다. 주변은 이미 폐허였고,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그 둘뿐이었다. 있는 것은 곳곳에 쓰러진 괴수의 잔해와 외로이 서 있는 한 기의 인형. 소녀의 모습을 한 인형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빛의 춤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늘을 수놓는 무수한 불꽃 사이로 거대한 강철덩어리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셔터 입니다!"

"날려버려!"

"라저!"

총류탄이 날아들자 셔터는 폭음과 함께 사라졌다. 폭발의 여파로 먼지가 자욱했지만 RH팀은 개의치 않았다.

"서둘러! 여왕까지 얼마 안 남았을 거다!"

"...소대장님!"

"뭔가!"

"도착했습니다! 여왕입니다!"

한발 먼저 셔터가 있던 곳을 통과한 소대원의 외침에 AE 군인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잠깐 당황했다. 그만큼 둥지 내부 구조가 변칙적이었던 것이다. 통로는 엉망진창으로 꼬여있는 주제에, 내부로 들어가도 들어가도 저항이 더욱 심해지는 일은 없었다. 괴수들과 마주칠 때도 그 규모나 성능은 거의 매번 비슷했기에 여왕에게 얼마나 접근했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마당에 여왕에게 도달했으니, 바라마지 않던 일이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 상황 보고해!"

"그, 그게... 여왕 뿐입니다!"

"뭐?!"

한층 더 어처구니가 없어진 소대장은 전투중이라는 것도 잊고 여왕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라보는 각도 때문에 방 안쪽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곳에 다른 괴수들이 더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가면 갈수록 해괴한 여왕이구만. 대체 뭐야?"

소대장은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여왕괴수 S-81은 그다지 높은 등급의 여왕이 아니었다. 영식을 둘이나 거느리고, 심지어 앤을 괴수로 개조하기까지 한 여왕이라는 점 때문에 과대평가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생산능력은 기껏해야 B급 정도. 실제로 상위 괴수는 최고가 5형, 그나마도 한손에 꼽을 수 있는 수였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왕이 자신을 호위할 괴수들까지 따로 마련해두지 않았다는 점은 역시 이상했다.

"어쨌든 우리에겐 다행이군. 1분대는 여기서 접근하는 놈들을 막는다. 2분대는 여왕의 방으로 돌입! 기사님들도 두분은 여기 남아주십쇼!"

"알았습니다!"

소대장의 말에 기사들은 두명은 통로에 남고 두명은 2분대와 함께 여왕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2분대원들과 기사들은 S-81과, 그 옆의 원통형 구조물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호위 괴수가 없는 것,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이 두개나 있는 것, 그 중 하나는 비어있는 것─ 투성이였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왕을 눈에 담은 기사 중 한명이 여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달려들었다.

"합!"

일격에 S-81의 목이 베어지며 체액이 솟구쳤다. 기사단과 AE 전군에 위기감을 느끼게 했던 여왕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기사는 AB소드를 옆으로 뿌려 체액을 털어냈다.

" 자, 이제 빨리 탈출합시다. 네트워크가 붕괴되었을 테니 놈들을 상대하긴 한층 더 쉬울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응?"

기사의 말에 분대원들을 불러 나가려던 2분대장은, 문득 시야 한구석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챗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아직 내부에 무언가 들어차있는 구조물이 있었다.

"뭐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 2분대장의 눈앞에서, 갑자기 구조물에 금이 가며 액체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철수하려던 분대원들과 기사들도 그제야 눈치챘다.

"전원 경계! 사격 준비!"

2분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열음과 함께 액체가 사방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나타난 것은,

"...인간?"

"...아니, 저건 인간이 아닙니다!"

분대원의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대답하듯, 중년의 기사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 표정은 경악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때 분명 죽었을 텐데! 아니, 설마 거짓보고였나?!"

"아니... 거짓은 아니었을 거야. 사실 그때 죽은 게 맞을 걸. 지금 난 그 찌꺼기... 같은 거랄까."

기사의 의문에, 그 존재는 구조물에서 걸어나오며 천천히 대답했다. 조용하고, 나른하게까지 들리는 말투에 2분대원들은 왜 기사들이 그토록 긴장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그런데... 비키지 그래? 난 지금 갈 곳이 있어."

" 웃기지 마라! 그래, 그때 죽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서 죽여주마! E-34!"

중년의 기사는 그렇게 외치며 눈앞의 소녀, 프레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말을 안 듣네. 상황이 상황이라 모처럼 무시해줄까 했는데..."

청파기공 육합 괴산(靑波氣功 六合 壞山)

자신의 공격이 채 닿기도 전에, 기사는 프레이의 손에서 뻗어나온 푸른 빛줄기에 상체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땡그랑 소리와 함께 주인을 잃은 AB소드가 땅에 떨어졌다.

"무슨 일인가!"

프레이의 파동기에 둥지는 중심부에서 외벽까지 이르는 거대한 터널이 뚫려버렸다. 그 충격으로 생긴 진동에 소대장이 연락을 넣었지만, 2분대는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방금 그 공격으로 분대원의 2/3과 기사 두명이 모두 죽었던 것이다.

"이... 이 괴물!"

2분대장이 내뱉듯이 말한 다음 순간, 또 한번의 푸른 빛줄기가 이번엔 분대원들이 들어온 통로 쪽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사라진 뒤, 그곳에는 둥지를 걸어나가는 프레이의 모습만이 있었다.




"뭐지?"

동료 기사들과 함께 피어를 몰아붙이고 있던 다니엘은 피어가 갑자기 거리를 벌린 다음 행동을 멈추자 의심스러운 생각에 더 추격하지 않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남아있는 전력은 기사 7명과 보병 2개 분대. 피해가 크긴 하지만 어떻게든 루시퍼를 쓰러트렸기에 적어도 적자는 내지 않은 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남은 인원으로 피어를 상대한다는 건 자살 행위일 테지만, 지금은 피어도 2형이나 5형 수준의 전투력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 소모가 심했기 때문에 해볼만은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어의 틈을 노리는 다니엘의 앞에서, 갑자기 피어가 등을 돌리더니 오로라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 도망치는 거냐, 그렇겐 안 되지!"

다니엘은 오로라 시스템이 완전히 발동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피어를 공격할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도 기동할 수 있는 것이 오로라 시스템의 장점이었지만, 피어가 지금 완전히 피폐해진 상태였기에 가동 개시부터 발동 완료까지 약간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여태 까지 우릴 그렇게 엿 먹이고 어딜 내빼시려고! 가고 싶으면 목을 내놓고 가라!"

다니엘의 공격에 이어 다른 기사들도 연속으로 피어를 덮쳐 들었고, 피어는 반격은커녕 방어에만 치중하며 계속 피해다녔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본 다니엘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어가 분명히 소모가 심하긴 해도 이렇게 회피와 방어만 할 정도까지 전력차가 심한 상황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도 팽팽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도중이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자리를 피하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만 비켜다오. 난 더 이상 싸울 의사가 없다.]

피어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하며 본의 아니게 움직임을 멈췄다. 괴수가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덜 놀란 것은 단장 권한으로 기밀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다니엘 뿐이었다.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냐. 지금껏 벙어리 행세 하다가 사정이 급해지니 가겠다고? 닥치고 여기서 죽어라!"

[난 이곳에 이제 볼 일이 없다. 그리고 너희들의 목적도 달성되었으니 더 싸울 이유가 없다. 떠나게 해다오.]

"우리들의 목적...? ...하, 그런가. 성공한 모양이군."

다니엘은 피어의 말을 듣고 전력을 나눠 한쪽이 적을 막는 동안 다른 쪽이 둥지의 여왕을 쓰러트린다는 계획을 떠올렸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피어를 놓아줄 이유는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14년 넘는 가동기간을 가진 S랭크의 영식인 것이다. 여기서 쓰러트리지 않으면 나중에 얼마나 더 골치아파질지 생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거랑 널 놔주는 건 다른 문제지. 그냥 얌전히 죽어!"

시간을 끌면서 에너지를 모아, 오로라 시스템으로 자리를 피하려던 피어는 속으로 혀를 차며 다니엘의 공격을 막아냈다.

다른 괴수들이나 인류는 모르고 있었지만, 프레이의 어머니가 바로 S-81이었다. 괴수는 자신이 보유한 유전자 데이터에 있다면 어떤 괴수든 생산이 가능─실제 가동까지 성공하는 것은 별개이지만─하기 때문에, 시리우스 계열이 엘리스 계열을 낳는 것도 가능했다.
프레이가 심어준 기초 정보 속에서 S-81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낸 피어는 프레이를 안고 S-81을 찾아가 프레이를 되살리는 대신 S-81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고, 몇년 후에는 떠돌이 신세였던 루시퍼마저 합류하게 되었다. 이 때 루시퍼가 가져온 정보 중에서 앤과 관련된 것을 찾아내고는 앤이 프레이 각성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S-81에게 레니핀 침공을 제안, 실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 S-81의 괴수 제어 네트워크가 붕괴한 것과 프레이의 뇌파가 각성상태에 들어간 것을 탐지한 피어는 더이상 S-81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기에 프레이와 함께 다른 별로 떠날 생각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피어의 상황으로는 쉽사리 몸을 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앤과 전력으로 교전중이던 프레이야는 갑자기 둥지쪽에서 뻗어나온 빛줄기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잠시 후에 똑같은 빛이 뻗어나왔을 때, 그 빛에서 파동기의 기운을 느끼고는 한번 더 놀랐다. 앤과 자신 외에 파동기를 쓸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깐 둥지 쪽에 정신을 돌렸던 프레이야는 앤이 둥지로 달려가려 하자 허겁지겁 그 앞을 막으며 검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AB 소드는 서로의 파동기를 상쇄시키며 다시 한번 부딪쳤다. 둘의 검이 힘겨루기에 들어갔을 때, 프레이야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었다.

"...켜... ...이......해..."

앤이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앤! 정신이 들어요?! 나 프레이야예요! 알아보겠어요?!"

앤이 지금 상태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말을 했다는 사실에 프레이야는 앤에게 말을 걸었지만, 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망가진 재생기처럼 어떤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흥분한 프레이야가 자신도 모르게 힘을 줄이는 바람에 프레이야가 튕겨 날아가고 말았다.

"아악! 큭...!"

재 빨리 자세를 잡은 프레이야는 앤과 둥지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앤과 대치하며 서 있는 프레이야에게 A-10이 통신기능을 이용해 말을 걸었다.

[프레이야, 방금 여왕의 네트워크 웨이브가 끊어졌어요. 여왕이 쓰러진 것 같아요.]

"그 래? 그러면 앤이 제정신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있는 거야?"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 상태로 봐선... 일단 무력화시키는 게 우선일 것 같아요.]

"...알았어. 뭐가 됐든 우선 멈추고 봐야 한다는 거지."

호흡을 가다듬은 프레이야는 앤에게 돌진해 다시 검을 부딪쳐갔고, 이번에는 주의를 기울여 앤의 말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만 알면 무언가 방법이 생길 것만 갔았다.

"...비... ...레......가......"

"앤? 앤! 제발 정신 차려요! 뭘 얘기하는 건데요?!"

"...비켜... ......가야 해..."

"앤? 어딜요? 어딜 가야 한다는 거예요? 앤!"

프레이야가 한번 더 묻는 순간, 앤의 왼손이 뒤로 당겨지며 파동기가 집중되었다. 프레이야는 방출형 기술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범위를 생각했을 때 피하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프레이야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도 왼손에 기공을 집중시켰다.

적파기공 육합 괴산(赤波氣功 六合 壞山)

창영기공 파산격(蒼影氣功 破山擊)

붉고 푸른 두개의 파동기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상쇄와 반발을 반복하며 응축되기 시작했다. 날뛰는 파동기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한 지면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미친듯이 진동하며 갈라지고 있었고, 대기는 비정상적으로 모이고 풀리는 것을 반복하여 흡사 토네이도가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는 말이 비유가 아닌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프레이야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프레이야는 앤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비켜... 프레이에게... 가야... 해..."

그 직후, 두사람을 중심으로 응축되어 있던 파동기의 에너지가 대폭발을 일으켰다.




"... 큭, 이런 빌어먹을!"

도망치려는 피어를 끝까지 붙들고 있던 다니엘은 갑자기 둥지 쪽에서 발생한 폭발음과 그 진동에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 사이에 피어는 거리를 벌리고는 그때까지 축적한 노심의 에너지를 단숨에 해방, 오로라 시스템을 가동시켜 전장을 이탈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피어가 남긴 궤적을 바라보던 다니엘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다 잡았는데... 망할. 저 자식을 잡았어야 되는 건데. 아, 진짜. 왜 이리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되는 게 없는 거야!"

마치 조금만 더 하면 쓰러트릴 수 있다는 식이었지만, 사실 다니엘과 동료 기사들의 체력과 초상능력도 한계에 달해 있어서 이제는 완전히 정신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시간을 더 끌면 위험해지는 건 피어가 아니라 기사들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냈다간 다니엘 성미 상 그냥 두지 않을 게 뻔했기에 다른 기사들은 그냥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분통을 터뜨리는 다니엘의 시선에, 둥지쪽에 서서히 먼지 구름이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일어났던 폭발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저건 대체 뭐야. 파동기끼리 충돌하면 저런 게 되는 거냐? 앤 아줌마도 아줌마지만, 그 꼬맹이도 완전 괴물이잖아."




전장을 이탈한 피어는 최대속력으로 둥지를 향해, 정확히는 다시 감지되기 시작한 프레이의 제어파를 향해 날았다. 오로라 시스템 덕분에 피어는 몇분 지나지 않아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프레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곧 프레이도 피어의 모습을 보았고, 피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프레이의 앞에 착륙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어머니. 다행입니다.]

어조는 평탄하고 문장 자체도 건조했지만 피어의 말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런 피어를 바라보는 프레이의 눈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어머니...?]

"그래, 그래. 오랜만이네. 근데 나 지금 엄청 열받았거든?"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리 내 딸이라지만, 엄마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서야 쓰겠니? 누가 앤에게 손을 대라고 했지?"

차갑다 못해 살기가 묻어나오는 프레이의 말에 피어는 몸을 굳혔다. 사실 피어도 프레이의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14년전 아린에서도 프레이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앤을 사랑하고 있었고, 피어 자신도 그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앤의 자살을 막았다. 그런데 그 앤을 납치하고 개조해서 장기말로 부려먹고 있었으니, 프레이는 지금 당장이라도 연관된 모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됐어. 그보다 서두르자. 앤은 어디 있지?"

하지만 프레이는 곧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곤 앤의 행방을 물었고, 어쩐지 서두르는 듯한 프레이의 행동에 피어는 약간이나마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피어는 그 이유를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프레이의 노심 반응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 래 괴수, 특히 상위괴수는 노심이라는 동력원의 구동에 의해 활동이 가능해진다. 인간에게 있어선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인데, 역시 심장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출력을 내는 것이 정상이지만 지금 프레이의 노심 출력은 불규칙하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하강시의 출력은 기동 한계치를 아슬아슬하게 웃도는 수준으로 매우 위험했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예전에 있었던 앤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노심이 정지되었던 것을 억지로 재기동시킨 것이다. 아무리 프레이를 되살린 것이 어머니에 해당되는 S-81이라 해도, 한번은 죽었던 노심을 되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재기동에 성공은 했지만, 출력이 안정되기도 전에 S-81이 제거되고 프레이가 의식을 되찾는 바람에 지금 프레이의 노심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프레이도 그것을 알기에 한시라도 빨리 앤을 만나려 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눈치챈 피어는 차마 프레이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윽..."

잠시 정신을 잃었던 프레이야는 다행히 금방 의식을 찾았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전신의 통증, 그리고 묘한 상실감이 불안한 느낌을 주었다. 서둘러 일어서서 앤을 찾으려던 프레이야는 시야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갑자기 좁아졌던 것이다. 그제야 프레이야는 오른쪽 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제야 덮쳐온 얼굴의 통증에 온몸을 떨며 바닥에 웅크렸다.

"아...! 아윽...! 으... 우욱...!"

파동기의 폭발에 튕겨나가며 함께 흩날린 돌조각 중 날카로운 것이 있었고, 그것이 프레이야의 오른쪽 눈에 박혀있었다. 손을 바들바들 떨며 돌조각을 만지던 프레이야는 돌을 뽑아내려 했지만, 그 순간 목 안쪽에서 솟구쳐오는 무언가 때문에 멈춰야 했다.

"욱, 우웨에엑...!"

프레이야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위액이 섞인 피를 토했다. 몸의 한계를 생각지 않고 무작정 끌어올린 기(氣) 때문에 내장이 상한 것이다. 토혈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프레이야의 옷은 이내 자신이 토해낸 피로 흠뻑 젖고 말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이 온몸을 덮쳐 왔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눈의 고통은 잊을 수 있었다.
한동안 몸을 웅크린 채 고통을 견디던 프레이야는 통각이 좀 둔해지자─통증이 가라앉은 게 아니라 지속적인 통증 때문에 오히려 통각이 반쯤 마비된 상황─ 천천히 주위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마치 맨틀 버스터라도 떨어진 것 같은 풍경이었다. 반경 1km 정도의 공간에는 높이가 50cm를 넘는 물체가 단 하나도 없었고, 자신은 직경 1km, 최심부 깊이가 150m는 됨직한 거대한 크레이터의 안에 쓰러져 있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사상력의 충돌로 생겼다고는 하지만 스스로가 봐도 어마어마한 규모여서, 이런 폭발 속에서 자신이 입은 부상 정도로 그친 것이 오히려 천운이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차, 앤! A-10!"

그제야 둘의 안전에 주의가 미친 프레이야는 벌떡 일어섰다. 무리한 움직임에 현기증이 일며 곧바로 쓰러질 뻔 했지만 무명을 지팡이처럼 써서 간신히 몸을 세울 수 있었고, 그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던 프레이야는 곧 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앤도 타격이 큰 듯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DC코트 역시 프레이야처럼 파동기에 의해 제구실을 못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찢어진 틈새로 앤의 몸을 보게 된 프레이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 맙소사... 앤..."

"가...야 해... 프레이...에게..."

앤은 입가에서 피가 조금 흐른 것외에는 큰 상처가 없었다. 그것도 프레이야가 토해낸 것에 비하면 아주 조금, 흘린 양은 뺨이 베어져 흐른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대폭발의 중심부에 있었는데 상처 하나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앤의 상처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수복된 것이다. 괴수의 세포로.
오른팔은 이미 어깨 부근까지 괴수의 것으로 변해 있었고, DC코트와 전투복이 찢어져 드러난 맨살 역시 모두 괴수의 조직으로 덮여있었고, 상체는 목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른팔에 이식된 괴수의 조직과 노심의 에너지가 상처가 생기는 즉시 괴수로서 복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까지, 앤은 단 한 사람만을 구하고 있었다.

"비켜... 프레이에게... 가야 해..."

말을 잃은 프레이야의 눈앞에서, 앤이 일어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쥐고 있던 AB 소드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지만 앤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런 앤의 모습을 본 프레이야는 당장 앤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느껴진 에너지의 파동에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괴수와 소녀를 보았다.




프레이야는 두번 놀랐다. 한번은 그 둘이 자기 뒤쪽 10여 미터까지 다가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또 한번은 소녀의 모습이 자신과 너무나 닮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프레이야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머리가 살짝 곱슬이라는 점, 그리고 오른팔이 어깻죽지까지 괴수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한층 더 혼란스러워진 프레이야를 지나친 소녀는 앤에게 다가갔고, 그 모습을 본 앤은 걸음을 멈추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기쁜 듯, 슬픈 듯,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앤."

"...프레이..."

조용히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미는 앤의 모습을 보고, 프레이야는 그제야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프레이, E-34가 이곳에 있는지 같은 의문보다 앤이 애타게 찾는 사람을 직접 보았다는 감상이 더 컸다. 앤과 프레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프레이야는 조금 늦게, 프레이와 함께 나타난 괴수가 영식 피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다니엘 단장님 쪽이 당한 건가?'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통신을 넣어보려고 했지만, 아까 있었던 폭발 속에서 통신기는 물론이고 디스플레이 고글까지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일단 주변에 떨어진 게 아닌가 찾아보려 하자, 피어가 서서히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눈에 프레이야의 몸 상태로는 전투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보고는 반쯤 무시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는 듯하자 조금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프레이야는 조금씩 살기를 높여가는 피어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찼지만, 잠시 후 느껴진 정체불명의 에너지에 저절로 온몸이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갑작스런 긴장 때문에 둔해졌던 통각이 돌아와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으며 바라본 에너지의 진원지는 앤과 프레이였다.




"다시 만나게 됐구나."

"그래, 너무 보고 싶었어."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그런데, 앤. 너 몸이..."

"아, 이거? 괜찮아. 너를 만났으니까 그걸로 충분한걸. 이제 여한은 없어."

앤의 의식은 S-81이 쓰러지고 괴수들을 제어하는 네트워크가 붕괴했을 때부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프레이를 보게 되자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앤의 인격이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S-81은 앤을 조종하기 위해 이성을 마비시키고 프레이를 그리워하는 감정만을 최대로 높여 놓았던 것이다. 예전 아린에서 눈물을 머금고 프레이를 베었던, 그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비겁하잖아."

"응?"

"그렇게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 비겁해."

"그치만, 너도 보면 알겠지만 오래는 못 버티는걸, 이 몸."

"다른 방법도 있다구."

"다른 방법?"

앤의 물음에 프레이는 장난스레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마치 가벼운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그거 있잖아. 하나가 되는 거."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프레이의 등에서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펼쳐지며 에너지 장이 두 사람을 감쌌다. 공격을 위한 것도, 방어를 위한 것도 아닌, 이질적인 두 개의 존재를 하나로 융합시키기 위한 불안정한 에너지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프레이야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안 돼!"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는 앤을 영영 잃게 될 거라는 예감에 프레이야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진동에 내장이 박살나는 것 같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프레이와 앤을 둘러싼 검은 날개는 서서히 간격을 좁혀 둘을 하나로 모으려 하고 있었다.

" 멈춰!"

한줌이나 남았을 기를 다리로 돌려 뛰쳐나가려던 프레이야는 피어가 자신과 앤의 사이를 가로막는 모습을 보고는 행동을 멈췄다. 피어의 노심도 다수의 기사와 벌인 장시간의 전투로 혹사당해 정상이 아니었지만 프레이야를 막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유의 거대한 양날창을 들어 자신을 겨누는 피어를 보며, 프레이야는 입술을 짓씹었다. 피어의 뒤편에 있는 검은 날개의 덩어리는 지금 이순간에도 그 크기를 점차 줄여가고 있어, 처음엔 지름 6m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5m까지 줄어 있었다. 앤의 체격을 생각해봤을 때 지름 2m까지 줄어들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비켜! 너와 상대할 시간 없어!"

[아니,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방해하지 말고 물러서라.]

평소같았으면 괴수가 말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을 테지만, 프레이야의 관심사는 오직 앤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에 피어의 말은 오히려 화만 돋궜을 뿐이었다.

"비키라니까!"

다리에 집중시키려던 기를 다시 일주천시켜 창영기공을 약하게나마 활성화시킨 프레이야는 그대로 피어에게 달려들며 무명을 휘둘렀다. 하지만 피어는 거창(巨槍)을 조금 움직여 프레이야를 튕겨냈다.

"큭!"

지면을 몇바퀴 구른 다음에야 자세를 잡은 프레이야는 날개 덩어리가 지름 4m 정도까지 줄어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일격에 피어를 뚫고 저 검은 덩어리를 갈라야만 했다.
프레이야는 심호흡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피어에게 다가가면서 기를 오른팔에 집중. 덩어리의 지름은 이제 약 3m 50cm. 피어와의 거리는 약 5미터, 날개 덩어리까지의 거리는 다시 약 20미터. 몸을 오른쪽 뒤편으로 반회전시키며, 왼팔을 앞으로 내밀고 무명을 쥔 오른팔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끌어모은 창영기공의 파동은 오른쪽 어깨에 집중. 덩어리 지름 약 3미터 30센티. 온힘을 다해 허리를 반대편으로 반회전 시키며, 오른팔을 힘차게 앞으로 찔러넣었다. 동시에 모아놓았던 파동기의 에너지를 해방, 오른팔을 전도체로 삼아 순식간에 검끝으로 쏘아내어 빛의 칼날을 형성했다. 프레이야의 오른팔이 파동기 방출의 여파로 어깨서부터 피부가 찢어져 나갔다. 무명을 타고 뻗어나간 파동기는, 하지만 피어가 피폐해진 노심의 출력을 끌어올려 생성한 배리어에 가로막혔다. 덩어리 지름 약 3미터. 무명의 증폭기능을 이용하고 있지만 피어의 배리어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배리어에 막힌 파동기의 칼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덩어리 지름은 이제 약 2미터 50센티. 프레이야의 오른팔은 이제 팔꿈치를 지나 손등까지 찢어져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무명을 쥔 손은 피에 젖어 미끈거리면서도 결코 검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덩어리 지름 2미터.

"──────────!!!!!!!!!!"

말조차 되지 않는 고함을 지르며, 프레이야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오른팔에, 무명에 쏟아부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이 더 이상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나 흩어졌고, 그 직전 무명은 자신에게 부어진 기공을 극한까지 증폭시켜 빛의 창날을 만들어냈다.

창영기공 천공섬창(蒼影氣功 穿孔閃槍)

빛의 창은 일순간 형성되고 사라졌지만, 길이 30m에 달한 창날은 배리어를 뚫고 검은 날개마저 관통하기에 충분했다. 지지점을 잃고 땅에 떨어진 무명, 팔이 사라진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감싼 프레이야, 왼쪽 어깨를 관통당한 피어. 서둘러 뒤를 돌아본 피어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프레이야의 눈앞에 검은 날개의 깃털이 하나 하나 흩어져 날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잠시 후, 검은 날개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각각 미간과 목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있는 프레이와 앤이 있었다.

괴수와 인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둘 다 소중한 존재를 잃은, 어찌 보면 동병상련을 느낄 수도 있는 관계였지만, 동시에 둘은 서로에게 원수였다. 피어는 한번 더 프레이야를 돌아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프레이에게 다가갔다. 그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어트리는 모습은 마치 명복을 비는 듯 보이기도 했다. 피어는 그대로 프레이를 안아들고는, 오로라 시스템을 전개해서 날아올랐다. 하늘 멀리,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프레이야도 곧 몸을 일으켰다. 출혈량이 너무 많아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비틀대는 몸을 추슬러 앤의 곁에 도착한 프레이야는 방금 피어가 그랬던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프레이야의 눈에 비친 앤은 편안해 보였다. 작은 미소마저 띠고 있는 앤의 표정을 보며, 프레이야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다니엘이 이끄는 LH 팀이 도착할 때까지, 프레이야는 무릎을 꿇은 채로 기절한 모습 그대로, 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주력 444년 4월 5일. 레니핀 탈환 작전 공식적으로 종료 선언. 이후 작전은 잔존괴수 소탕작전으로 이행. 행성 등급은 '주의'. 비교적 침식 초기에 여왕을 제거한 덕에 행성 자체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큰 희생을 치른 끝에 S-81과 영식 루시퍼를 쓰러트린 기사단은 파견 지연과 이로 인한 희생 증가의 책임을 물어 원로원 의원의 절반 이상을 해임, 분위기를 일신했다. 레니핀 정부는 연합에 재가입했으며, 기사단과 피어시나이트 협상도 재개하여 최종적으로 시가의 70%로 판매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영식 피어는 프레이야의 눈앞에서 도주한 후 목격되지 않았다. 예전 루시퍼가 그랬던 것처럼 포위망을 뚫고 다른 성계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레니핀 전투에서 입수된 인간의 괴수화 정보는 극비로 분류되어 AE와 기사단 최상부 인물들만 아는 기밀이 되었으며, 당시 전투에 참가하여 이를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침묵 서약을 해야만 했다.

프레이야와 앤의 파동기 폭발에 휘말렸던 A-10은 다행히 큰 손상없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마스터인 앤이 사망하면서 리미터 해제가 불가능해져 실전에 투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과정을 거친 후 제작자인 토르에게 반환되었다. 프레이야가 앤의 피보호자이긴 했지만 정식으로 유산 상속권까지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토르에게 반환이 결정되자 돌 컴퍼니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려고도 했지만 결국 재판까지 가지는 않았다.




프레이야는 황폐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오른쪽 의안은 디스플레이 고글과 통신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모든 정보의 송수신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의안에 상위괴수가 포착되자, 프레이야는 동료 기사들과 함께 달려나갔다.

레니핀 전투 이후, 프레이야는 극도로 말수가 적어졌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마일로나 미유키, 심지어는 A-10과도 몇마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퇴원한 후에는 작전 참가 후 그에 따른 포상 휴가, 그리고 휴가가 끝나는 즉시 다른 작전에 참가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괴수를 쓰러트리는 것만이 삶의 이유라는 듯한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여유를 가지라고 조언했지만 프레이야는 전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 날도, 프레이야는 가장 앞서 상위괴수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직 전장만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자신이 멈추는 것은 숨이 끊어질 때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눈에 비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전 우주에 오직 하나.

그리고 그 하나를 만나게 되면, 둘은 추억과 슬픔을 공유하며 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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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지금 봐도 중간... 프레이와 앤이 만나는 부분은 어색하지만, 어떻게 고쳐야할지 아직도 감이 안 잡혀서 이번에도 그냥 냅뒀습니다.

사실 엔딩은 이번의 엔딩이 원래 구상하던 것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구상부터가 식령 제로의 엔딩을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요미가 죽은 직후 오열하며 백예를 불러낸 카구라의 모습...이었지만, 조금...이랄까, 꽤 많이 달라졌네요. 그리고 카구라는 그 후 많이 어른스러워졌지만, 프레이야는 반쯤 폐인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OTL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 동안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실망하셨다면 죄송합니다 (...)

그럼 다른 이야기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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