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자, 이쪽입니다."

세환에게 서 있을 자리를 알려준 남자는 눈앞의 수많은 '문'으로 다가가서는 두개의 문을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서늘한 냉기와 함께 끌려나온 것은 두 구의 시신이었다. 새하얀 천으로 덮여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세환은 그 두 시신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두 개의 천을 끌어내렸다. 정확하게 목까지만. 그리고 세환은 2주만에 겨우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핏기가 사라져 창백했지만 두 분의 얼굴에는 조그만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천으로 가려져 있는 목 아래까지 그럴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사망 경위를 들은 바로는 대피 중 거미형 로봇의 습격을 받아 두분 모두 현장에서 즉사하셨다고 했다. 아마 복부가 심하게 헤집어졌거나, 심장이 관통되어있을지도 몰랐다.

"부모님이 맞으십니까?"

멍하니 두 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자신을 이곳까지 인도해준 경찰이 확인차 물었다. 그제야 세환은 자신이 두분의 신원을 확인하고 시신을 인도받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세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맞아요. 제 부모님이예요."




《그래도 살아간다》 - 7. 도망칠 수 없다




눈 깜짝할 새 20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동안, 세환은 의외로 바쁘게 지냈다.



두 분의 시신을 인도받고,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하고.

사망 신고를 하고, 가재 도구를 처분하고, 차를 팔고.

앨범을 챙기고, 집을 팔고, 방을 구하고.



집을 판 후, 세환은 학교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구해서 살고 있었다. 혼자서 살기에 35평짜리 아파트는 너무 컸고, 이제 재물에 관심이 없어졌다는 점도 한몫했다. 그렇게 자취 생활을 한 지 약 20일. 식사는 삼시 세끼를 모두 학교 식당에서 해결하고, 방에선 그저 잠만 잘 뿐이었다.
아버지가 외아들이셨고 조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은 외가쪽이었지만, 세환은 신세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가봤자 사실상 얹혀사는 게 되고, 자주 만나는 친척도 아니니 살갑게 대해줄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세환 스스로가 다른 사람과 만나는 걸 피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2학기가 개강했지만 세환은 수업을 받지 않았다. 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는 식사 때에는 식당에 가고, 남는 시간에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이런 저런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세환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었는지, 진석과 민우가 수시로 전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지만 세환은 그 모두를 무시했다. 핸드폰을 해지하러 나가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저 배터리를 뽑고 방 구석에 던져놓은 채였다.




20XX년 9월 중순.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지하, 비밀 회의실.

이번 회의는 지금까지 열렸던 회의와는 조금 달랐다. 우선 보고자가 두명이었다. 한명은 부스스한 머리에 트레이닝 복을 입은 메카트로닉스 박사, 그리고 새로 회의에 참석한 한명은 평상복 차림에 은테 안경을 쓴 위치천문학 교수였다. 저명한 사람이긴 하지만 정부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비밀 회의에 참석할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이런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은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먼저 연단에 선 것이 위치천문학 박사였고, 박사의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 때문에 각료들은 그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자, 교수님. 그러면 발표를 해주시겠습니까."

숨소리만 들리는 회의실에서 드디어 대통령이 입을 열어 교수에게 발표를 부탁했다. 교수는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콘솔을 조작해서 화면을 띄웠다. 떠오른 화면은 우주 어딘가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음... 일단 제 소개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하려는 내용에 비하면 하잘 것 없다는 뜻입니다."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교수의 태도에, 각료들은 한층 더 긴장했다. 대체 어떤 내용 때문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벌써부터 걱정되고 있었다.

"여기 화면에 띄운 4개의 사진은, 모두 같은 주역(宙域)을 촬영한 것입니다."

교수의 말에 회의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진을 비교해보기 시작했고, 곧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사진은 평범했다. 하지만 두번째 사진에서는 한 구석의 별 몇개가 보이지 않았고, 세번째, 네번째 사진으로 갈수록 안 보이는 별의 숫자가 늘어갔다. 마치 무언가로 가려지고 있는 듯했다.

"교수, 이건..."

각료 중 누군가가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짐작은 가지만 도저히 믿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 심정이 이해된다는 듯, 교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두번째 사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관측 불가 구역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1년 전의 사진이고, 두번째는 6개월 전, 세번째는 3개월 전, 네번째가 한달 전입니다. 그리고..."

교수는 말을 잠시 멈추고 콘솔을 조작했고, 곧 새로운 사진이 화면 중앙에 떠올랐다. 네번째 사진보다도 가려진 별의 숫자가 늘어난 것이 확연히 눈에 띄는 그 사진을 보고 모두들 신음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어제 촬영된 사진입니다. 현재 위성 궤도의 천체 망원경 다섯 대가 집중 관측중입니다."

침묵.
회의실은 이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 아니 지금 이 회의실에서 보고되고 있다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인정하기 싫은 '그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다들 사고가 정지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대통령이었다.

"확실히 하지요, 교수님. 지금 관측중인 '저것'이 지구에 로봇을 보내고 있는 외계인의 모선이라고 생각됩니까?"

돌려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핵심만을 질문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각료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꺼림칙한 사실은 무의식중에라도 피해가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인데, 대통령은 그 피해가고 싶은 사실을 정확하게 찔러대고 있었다. 각료들은 대통령이 여러가지 의미로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인공물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천체물리학 연구실의 분석에 의하면, 자연 천체라면 당연히 방출해야할 각종 에너지 및 파장이 전혀 검출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발견이 늦어진 것은 그 이유도 한몫 합니다. 사실 에너지나 각종 파장의 방출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리 기술력으로 검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리고 자연물에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으니 분명 인공물일 겁니다."

"그렇다면 교수, '저것'의 이동경로는 어떻소. 지구로 향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오?"

각료 중 한명이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적어도 '그것'이 지구로 향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공포를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표를 진행하며 도리어 마음이 차분해진 교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인공물일 경우 현재 궤도를 반드시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현재까지의 이동 경로로 추측해볼 때 지구로 다가오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질문했던 각료는 축 늘어졌다. 자신의 마지막 기대가 무너져서인지, 그의 표정은 꼭 혼백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사실은 아직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교수님, 아직 발표하지 않으신 것이 있지요."

어두운 표정의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각료들은 대통령과 교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각료들로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발표할 게 더 남아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크흠."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목을 가다듬고는 연단에 놓인 물을 한모금 마셨다. 교수가 뜸을 들이는 모습을 본 각료들은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보다 더 심각한 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 인공물은 현재 지구로 다가오는 궤도를 진행중입니다."

각료들은 교수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런다고 '저것'이 지구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료들의 심정은 그 정도로 절박했다. 하지만 교수는 무심하게 발표를 이었다. 교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오히려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물체가 현재 속도와 궤도를 유지할 경우..."

교수의 입에서 선고가 떨어졌다.

"늦어도 4개월 안에 지구 궤도에 도달합니다."




「마스터,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세환이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브룬힐데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세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책만 고르고 있었다. 세환에게서 대답이 없자 브룬힐데는 다시 말을 걸었다.

「마스터, 중요한 내용입니다. 꼭 아셔야 합니다.」

'보고를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제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니까.'

「......」

감정이 담기지 않은 듯한, 하지만 무언가를 잔뜩 억누르고 있는 듯한 말투의 대답에 브룬힐데는 잠시 망설였지만 보고를 시작했다.

「나사(NASA)에서 지구에 접근중인 거대 인공물체를 탐지했습니다.」

브룬힐데의 보고를 듣는둥 마는둥, 세환은 책을 한권 뽑아들고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작 몇미터 움직이면서도 세환은 자주 비틀거렸다. 지난번 전투 이후로 전정기관에도 이상이 나타난 때문이었다. 종종 다리에 힘이 빠지는 현상까지 겹쳐, 세환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넘어질 뻔한 일도 많았다.
책상에 앉아 책을 넘기려니, 브룬힐데의 보고가 이어졌다.

「나사에서 분석한 목표물의 외형은 제르누르에서 관찰된 카라타스의 모선과 동일합니다. 현재 모선의 이동경로와 속도로 보아 지구 도달까지 100여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모선이 지구에 도착한다는 말에 세환은 잠시 멈칫했지만 금새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 세환의 모습은 책을 읽던 사람이 주변에서 들려온 소음에 반응을 보인 것에 불과한,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마스터...」

'시끄러워. 그래서 뭐.'

계속되는 브룬힐데의 말에 결국 세환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야말로 '어쩌라고' 식의 톡 쏘는 말이었다. 세환의 그런 태도에 브룬힐데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세환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마스터, 상심이 크시겠지만 이건 중요한 일입니다. 모선이 지구에 도달하기 전에 격파할 방법을 찾아야...」

'상관없잖아, 다 죽어도.'

「마스터?」

'어차피 나도 오래 못 살 테고. 부모님도 돌아가셨고. 그리고 사람은 어차피 나이 들면 죽게 돼 있지. 굳이 그 녀석들 막으면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마스터,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카라타스는 점령한 별의 환경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황폐화시킵니다.」

'아, 그래서 그게 뭐? 어차피 별도 수명을 다하면 폭발하거나 초신성되거나 하잖아. 상관없잖아, 그냥 둬도.'

「하지만 마스터, 언젠가 죽을 목숨이라고 남은 생을 포기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너도 잘 알 거 아냐. 인간은 어차피 모순으로 가득 찬 존재라고. 그러니까 내버려 둬.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마스터, 바로 이 순간에도 모선은 다가오고 있고, 지금 이 순간 태어나는 새 생명도 있습니다. 모선이 지구에 도달하는 그 순간 햇빛을 보게 되는 아기도 있을 겁니다. 그런 아기들마저 죽으라 하시는 겁니까?」

'말했지? 어차피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다고. 그 시간이 약간 달라질 뿐이야. 결과가 같다면, 그리고 그 결과를 평가해줄 누군가도 없다면 과정에는 의미가 없어.'

거기까지 말한 세환은 더 말하지 않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완강하게 싸움을 거부하는 세환의 태도에 브룬힐데는 암담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세환의 마음을 돌릴 방법이 없었다.




20XX년 9월 말, 미국 뉴욕. 현지시각 새벽 2시 경.
대피 경보는 40분 전에 발령되었지만, 워낙 인구가 많다보니 뉴욕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대피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결국, 아직 인구의 90% 이상이 도심을 채 빠져나가지 못한 상황에서 착륙선이 낙하했다. 뉴욕 시장이나 미국 대통령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리를 감싸쥐며 책상에 이마를 찧었다고 한다.




낙하시간 30분전, 대한민국 서울. 현지시각 오후 3시 30분 경.

「마스터, 적입니다.」

도서관에서 책상에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던 세환은 브룬힐데의 전언에 잠에서 깼다. 하지만 조금 움찔하고 눈만 깜빡 거렸을 뿐, 더 이상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물론 브룬힐데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스터, 이번 낙하 지역은 미국 뉴욕입니다. 인명 피해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요지부동. 세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브룬힐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스터, 카라타스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병기는 지크프리트 뿐이고, 지크프리트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마스터 뿐입니다. 출격하셔야 합니다.」

여전히 무반응. 브룬힐데로서는 도무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강제출격시키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랬다간 세환과 브룬힐데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지금 세환의 정신 상태로는 강제로 출격시킨다 해도 스스로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주저하던 브룬힐데는 다시 한번 세환을 설득해보기로 했다.

「마스터, 마스터가 출격을 거부하실 경우 강제출격도 가능합니다.」

움찔. 세환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눈은 감고 있는 그대로였지만 세환은 브룬힐데의 말에 대답했다.

'강제출격이라고?'

「그렇습니다. 적이 침공해온 상황에서 파일럿이 출격을 거부할 경우를 대비하여, 파일럿의 의사와 상관없이 콕핏으로 강제 전송시켜 신경접속과 출격을 강제하는 프로그램이 짜여 있습니다.」

'킥... 완전히 실험용 모르모트로구만. 아니, 목줄 채워진 개인가? 어디 해보시지? 그러면 그 자리에서 죽어드릴 테니까.'

세환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마스터, 강제출격도 소용없으리라는 것은 저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출격하십시오.」

'내가 안 가도 되잖아. 어차피 핵 떨구면 잡을 수 있겠지. 안 되면 안 되는 거고.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다고, 이제 나한텐.'

「마스터...」

브룬힐데의 말을 무시하며, 세환은 자리에서 거칠게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았지만, 세환은 그 시선을 무시하며 출입구로 향했다. 브룬힐데가 말을 건네는 통에 잠이 다 깨기도 했고, 다시 자기도 그른 것 같아 교정이나 한바퀴 돌아볼 셈이었다.




『여기는 알파-1. 목표물 포착. 지금부터 공격을 시작하겠다.』

『라져. 적의 장갑은 상상 이상으로 튼튼하다. 최대한 관절을 노리도록.』

『라져, 알파-1.』

뉴욕 상공. 한 무리의 전투기가 굉음과 함께 카라타스의 로봇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착륙선이 낙하하고 30분이 지난 지금, 뉴욕은 온통 부서진 차량의 잔해와 여기저기 널린 시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인구가 많은 만큼 혼란은 다른 도시보다 훨씬 컸고, 그만큼 인명 피해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로 불리던 뉴욕은 지금 죽음의 도시로 바뀌어 있었다.

『편대 주목, 알파-1이다. 지금부터 로봇을 공격한다. 방어력이 높다고 하니 가능한 관절 부위를 조준할 것.』

편대장이 지시를 내리는 사이, 카라타스의 로봇은 어느새 미사일 사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미사일 조준이 완료되는 즉시 공격을 지시하려던 편대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사일 록 온(Lock on)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왜 이러지?!』

『설마 재밍(Jamming)인가?』

『하지만 레이더에는 제대로 잡히고 있잖아!』

편대 통신망은 순식간에 혼란으로 가득찼다. 록온이 안 되면 미사일을 쏜들 명중시킬 수가 없었다. 건물처럼 고정된 목표도 아닌데다, 확인된 바로는 저 로봇의 운동 능력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도록 잽싸다고 했다. 유도되지 않는 미사일 따위는 어렵지 않게 피해낼 것이 분명했다.

『이런 제길. 사령부, 여기는 알파-1! 목표에 록 온이 되지 않는다! 미사일 유도가 불가능하다!』

『뭐?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알파-1. 이쪽 레이더에는 분명히 제대로 탐지되고 있다.』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기체 레이더에는 확실히 잡히는데 미사일은 록 온이 안 돼! 이대론 공격을 할 수가 없다!』

『그럴 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젠장,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단 말이다!』

오퍼레이터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통신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통신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 같았다.

『동부 방공 사령관이다. 일단 시간이라도 끌어야 하니 무유도 방식으로라도 미사일을 쏴라. 이후에는 기총 소사로라도 주의를 끌도록.』

사령부의 지시에 편대장은 기가 막혔다. 당장 상대할 방법도 막막한 적을 상대로 시간을 끌라는 것은 그냥 죽으란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계급장에 별을 단 채 안전한 곳에서 느긋하게 지시를 내리는 높으신 분에게는 험한 소리는 고사하고 반박조차 할 수 없는 곳이 군대였다. 편대장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라져, 알파-1. 지시대로 작전 수행합니다.』

하지만 편대장이 대답한 순간, 폭음이 들려왔다. 아직 미사일도 쏘지 않은 상황에서 들려온 폭발 소리에 편대장은 당황해서 외쳤다.

『뭐야, 누가 먼저 쐈나?!』

『녀석이다! 알파-3가 당했다!』

『뭐?!』

미사일 록 온이 안 되는 문제 때문에 사령부와 통신을 주고받는 사이, 적 로봇은 이미 전투기 편대를 적으로 판단하고 공격 준비를 끝마쳤던 것이다. 편대장의 경악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대의 편대기가 다시 격추되었다. 공격은 로봇의 눈에서 발사되는 푸른 빛의 광선이었다.

『뭐야 저건, 레이저인가?』

편대장에게 의문을 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바로 다음 공격이 편대장기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알파 편대가 전멸했습니다."

버지니아 주의 미국 국방성, 긴급 상황실.
오퍼레이터가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투기 편대의 전멸을 보고했다. 로봇이 공격을 개시하고 편대가 전멸하기까지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병기에 사용된 기술력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방공 사령관은 침울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편대를 출격시키는 건 여러모로 낭비요... 그쪽은 아직이오?"

"곧 준비가 끝납니다. 출발하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사령관의 질문을 받은, 양복 차림에 안경을 낀 남자가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남자는 엷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 자. 서둘러, 서둘러! 시간이 없다고! 어서, 어서!"

"재촉하신다고 빨리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럴 기운 있으면 좀 와서 도우세요!"

미국 애리조나 사막 어딘가의 지하에 있는 비밀 시설.
연구시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초거대 공장에 가까워 보이는 그곳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분해하고 연구 분석하고 재조립해온 물건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연결 준비 완료! 지금 할까요?!"

"잠깐만 기다려! 여기 세팅이 아직 덜 끝났어!"

지금까지 수집된 잔해들을 이리저리 짜맞춘 결과, 하나 정도는 되살릴 수 있을 만큼의 부속이 모이자 연구원들은 기체의 재구성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외계의 물건이긴 하지만 분해가 가능했다면 재조립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매달린 덕분인지, 한달쯤 전에는 단 한 부속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거, 정말 연결해도 되는 거겠죠? 연결하는 순간 갑자기 꿈틀거린다거나 팔다리를 퍼덕거린다거나 그러진 않겠죠?"

"이보게, 이게 무슨 사람인 줄 아나? 금속 근육이 적용되어 있긴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고."




문제가 된 단 한 부분은 바로 동력로였다. 지구의 기술로는 거대 로봇이 움직이는데 충분한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동력기관이 없었다. 그리고 거대 로봇의 에너지 수신장치는 매번 지크프리트에게 부서졌기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며 모두가 낙담하고 있던 그 때, 한 젊은 연구원이 살짝 방향을 돌려 생각해봤다.

'큰 거 하나로 채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작은 거 여러 개로 보충하면 되지 않을까?'

그 연구원은 거미형 로봇의 에너지 수신장치를 연결해 거대 로봇의 동력원을 대체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실제로 착륙선이 지구에 접근할 때마다 수집되어 있던 거미형 로봇의 에너지 수신장치가 활성화 되는 것이 확인된 바 있었기에 그 제안은 그대로 일사천리로 진행, 지금 이렇게 본체 장착만을 남겨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멀리 뉴욕에서 막 강하한 거대 로봇이 난동을 피우고 있는 지금, 이들은 자신들이 재생시킨 로봇에 활성화된 동력 수신장치를 장착해 적 로봇과 싸우게하려 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국방성에 있었지만 비밀 회의실도, 긴급 상황실도 아닌 브리핑 룸에 있었다. 한쪽 벽에는 애리조나의 시설에서 진행되고 있는 로봇 재생 과정이 투영되고 있었고, 대통령 옆에는 보좌관과 경호원, 그리고 트레이닝 복 차림의 박사가 서 있었다.

"확실히 움직이는 겁니까, 박사님?"

"이론상으로는 확실합니다. 실제 상황에서 어떻게 될 지는 이제부터 확인해봐야 하지만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박사의 말에 대통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대로 테스트조차 되지 않은 병기를 곧장 실전에 투입해야한다니,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다. 아무 말 없이 탁자를 내려다보던 대통령은 그제야 뭔가가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박사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거, 조종은 어떻게 합니까?"

"네? 아, 조종 말씀이십니까?"

"네, AI로 움직이기에는 아직 인공지능 기술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야 당연하지요. 저런 걸 어떻게 AI에게 맡기겠습니까. 원격조종입니다, 원격조종."

"원격조종...이라구요?"

대통령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이 잘 안 오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사는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설명했다.

"거, 대통령께서는 어렸을 때 격투게임 같은 거 안 해보셨습니까? 왜 3D 격투게임 있잖습니까. 그 프로그램을 좀 응용해서 넣었더니 제법 쓸만하더군요. 일단 시뮬레이션 상에서는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한숨. 대통령은 슬슬 위장이 아파왔다. 아무래도 하야를 준비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대통령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설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던 박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 드디어 연결하는군요. 대통령님, 보시죠. 이제 움직일 겁니다."

박사의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들었다. 박사의 말처럼, 동체의 공간에 동력 수신장치가 놓이고 연구원 몇명이 막바지 연결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열려있던 가슴 장갑판이 닫히고 연구원들이 서둘러 물러나는 모습이 비춰졌다. 그와 함께 로봇의 동체가 서서히, 하지만 확실히 일어서려 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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