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아."

세환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는 뭔지 모를 털뭉치 비슷한 것이 놓여있었다. 처음에 저게 뭘까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던 세환은 곧 그것이 자동차에 치여 죽은 떠돌이 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환이 있는 쪽으로 주검의 등이 향해 있어서 끔찍한 모습이 안 보였던 탓에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계절은 여름. 7월 중순의 푹푹 찌는 날씨에 개의 주검은 악취를 풍기며 파리떼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쌀을 찌푸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가능하면 마주치고 싶지도 않겠지만, 횡단보도 한 가운데에 놓여있다보니 마주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미용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그것을 발견한 세환은 한동안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래도 살아간다》 - 5.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죽어나가는 생명들은 수도 없이 많겠지..."

「생명체의 출생은 사망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건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걸 눈으로 직접 보고나면 기분이 영 꿀꿀하단 말이지."

그 날 밤, 세환의 방.
자리에 누운 세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브룬힐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심야 TV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부모님은 일찌감치 주무셨기 때문에 혼잣말 한다고 오해받을 걱정은 없었다.

"하긴 회자정리라는 말도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말도 있긴 하지. 그래도 역시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런 것 치고는 마스터의 취향이 고난과 죽음과 관련된 쪽으로 편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세환은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아주 큰 소리는 아니어서, 부모님이 깨어나는 기색은 없었다. 세환은 놀란 가슴을 누르며 속으로 브룬힐데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너 혹시 내가 TV 보는 것도 다 모니터링하고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마스터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위험 회피를 위해 마스터의 감정과 생각을 상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전에 분명히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마스터에게 사고가 생겨 지크프리트가 출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건 그렇다만...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도 사생활이란 게 있다고.'

「현재 지구와 인류가 처한 상황에서 사생활을 논할 여유가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저기 말이야, 이거 엄연한 인권 침해거든?'

「그렇다고 해서 고정되어있는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도 없습니다. 감정 및 사고 분석 전송 프로그램은 마스터의 체내에 있는 나노머신에 들어있고, 그 프로그램을 수정할 권한이 저에게는 주어져있지 않습니다.」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얘기냐...'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포기하십시오.」




"지난 달, 도쿄에 출현했던 URG-07의 1차 분석 결과를 보고하겠습니다."

미국 연방 정부의 고관들은 이제 슬슬 이 회의에 질려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벌써 반년이 넘게 눈에 확 띄는 성과도 없고 예산과 시간만 하염없이 소모되고 있으니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요인들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과학자는 여전히 후줄근한 옷차림과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사실 결과 보고라고 말씀드리기도 어려운 것이, URG-07의 경우에는 손상 부위가 지금까지의 URG 시리즈보다 훨씬 적다보니 내부 분석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인간형의 URG 시리즈는 내부 구조가 동일하다는 것도 분석 도중 파악된 일도 있고 해서, 이번 분석은 본체보다 무기의 분석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어, 카라타스의 로봇이 사용한 두 개의 채찍이 나타났다. 하나는 돌돌 말려 있는 모습, 하나는 길게 펴져 있는 모습이었다.

"재료에 대한 분석은 이전과 다름없이 분석 불가능 결과가 나왔지만, 일부 손상된 부분을 통해 분석해본 결과 저 채찍의 내부 구조는 URG 시리즈에 적용된 인공 근육체와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 정도의 유연성과 강인함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죠. 다만 재질 자체는 인공 근육에 사용된 것과는 좀 다를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과학자는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며 보고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그 보고를 듣는 각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각료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이런 분석이 아니라 그 분석 결과의 응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현은 아직도 불가능하오? 소체도 제법 모였고, 최소한 마이너 카피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되는데."

결국 참을성 부족한 각료 한명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몇몇 각료가 살짝 눈을 흘기긴 했지만 속내는 똑같았기 때문에 제지하거나 면박을 주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과학자는 버릇대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게 말이죠, 사실 지금까지 수거한 로봇들을 이리저리 짜맞추면 한두대 정도는 재현 가능한 만큼의 부속이 모였습니다."

과학자의 이 말에 회의실은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다. 기대와 우려가 한데 섞여 회의실이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과학자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해체와 재구성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 시간이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인류의 과학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물건이다보니 이게 분해와 재조립에 시간이 엄청 걸리거든요. 지금까지 분해작업 진행률이 30% 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 재조립 시간까지 고려하고 조종석 설치나 동력원 같은 것까지 고려해보면 실제로 얼마나 걸릴지 장담을 못합니다."

빠르게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그보다 빠르게 식어버렸다. 회의실 분위기는 차분해진 정도를 넘어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렇게 좌절한 각료들을 한번 둘러본 과학자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가니? 지금 시간에."

"아, 친구가 좀 만나자고 해서요. 아무래도 술 먹게 될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저녁 드세요."

"그래? 그런데 혹시 친구한테 무슨 일 있니? 왜 이런 시간에 전화를 해서 불러낼까."

"...신검 받았는데 재검 판정 나왔대요."

얘기를 끝낸 세환은 집을 나섰다. 전화를 걸어온 건 진석이 녀석이었다. 오늘 신검을 받았는데 재검 결과가 나와서 우울해 죽겠으니 술이나 마시자며, 벌써 민우도 불러냈으니 얼른 나오라고 성화였다.

"나 참,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건강 그 자체인 녀석이 재검 판정이 나오는 거야? 하룻밤 샌다고 컨디션이 그 정도까지 추락하지는 않을 텐데."

약속장소로 나가면서 세환은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누가 봐도 진석보다 체격도 작고 힘도 약해 보이는 자신은 1급 현역 판정이 나왔는데 진석이 재검 판정이 나왔다고 하니 기분이 나쁠 만도 했다. 그래도 면제가 아니고 재검이라는 점을 위안삼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진석은 벌써 민우를 붙잡고 신세 한탄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방적으로 민우에게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생각을 해봐. 어째서 내가 재검을 받아야 하느냔 말이야. 현역이면 현역이고 면제면 면제지, 애매하게 재검은 또 뭐냐고. 한번에 딱 잘라서 판정 내려주면 속 편하고 좋잖아. 왜 서로 번거롭게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하느냔 말이야."

어지간히 시달렸는지, 민우는 표정을 구긴 채 대답도 안 하고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가득해서 보는 사람이 다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적당히 해라. 술도 안 먹고 벌써부터 주정하냐?"

보다 못한 세환이 뒤에서 진석의 등을 툭 치며 말을 건넸다. 뒤를 돌아본 진석은 이번엔 한탄을 늘어놓을 상대를 세환으로 바꿨는지 양손으로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세환은 슬쩍 손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서라, 여기서 한마디만 더 신세한탄 늘어놓으면 나 그냥 간다. 술 먹고 싶으면 적어도 지금은 좀 진정해."




호프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셋은, 아니 정확히 말해서 세환과 민우는 벌써 1시간째 진석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있었다. 그 1시간 사이에 세환은 극도로 피곤해졌고, 민우는 아예 신경을 끊었는지 이젠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진석은 둘이 듣든 말든, 맞장구를 치든 말든 자기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아, 차라리 면제를 때리든가아, 아니 왜 재검이냔 말이야아..."

"...좀 물어보자. 그런데 너 어제 대체 뭐했냐?"

견디다 못한 세환이 진석의 말을 끊고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진석은 이해를 못했는지 눈을 껌뻑거리면서 세환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답답해진 세환은 다시 차근차근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제 오후부터 뭘 했냐고. 며칠 어디 여행갔다 어제 돌아온 건지, 밤을 꼴딱 새운 건지, 만약 그랬다면 뭣 때문에 그랬는지 말이야."

"아, 그런 얘기였구나. 그러니까아, 잠든 게 새벽 3시 좀 넘었나?"

세환은 기가 막혔다. 대체 뭘 하느라고 신검받는 날 새벽 3시에 잠이 든단 말인가. 대개 몸 상태 망가지지 않은 상태로 가는 게 상식이 아니었나.

"도대체 뭘 했는데?"

"술 마셨어. 갑자기 땡겨서 말이야."

"......" / "......"

질문을 던졌던 세환과 잠자코 술만 조금씩 마시던 민우, 둘 다 그 말을 듣고는 굳어버렸다. 새벽 3시까지 술을 퍼먹은 다음 신검을 받고는 재검 판정이 나왔다고 신세 한탄을 늘어놓으면서 지금 또 퍼마시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이가 없는 수준을 넘어, 개념이 안드로메다를 지나 차원벽을 뚫고 미지의 저편으로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를 붙잡고 잘났다고 넋두리를 하고 있단 말이냐..."

"가자. 술값은 이 놈이 알아서 내겠지."

"야, 야!"




20XX년 7월 중순경.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시민들에게는 대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인도적 견지라고 생색을 내며 모처럼 미국에서 외계 로봇 착륙선의 낙하 예상 지점이 카라카스라고 베네수엘라 정부에게 경고를 했지만,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관, 그리고 국회의원 일부만이 그 정보를 듣고 수도를 빠져나갔을 뿐이었다. 시민들로 북적거리는 카라카스의 도심에 착륙선이 낙하했을 때, 그 시간에 회의 중이어야 할 국회 의사당과, 대통령이 집무를 보고 있어야 할 대통령 관저는 텅 비어 있었다.




"젠장, 이건 어떻게 된 거야!"

낙하 현장에 도착한 세환은 주변을 보고는 소리질렀다. 거대한 해머를 들고 있는 적 로봇과 지크프리트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아직도 바글바글한 상황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까지 싸워온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완전히 대피를 끝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이번처럼 대피는커녕 경찰이나 군대의 인도조차 없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난데없이 날벼락을 뒤집어쓴 카라카스의 시민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있었지만, 도심 한복판이다보니 인파가 밀려 좀처럼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미형 로봇들은 아무 제지없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자식, 피난 권고조차 안 한 거냐! 지가 무슨 이승만이야?!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해놓고 지가 제일 먼저 내뺀 놈 본받은 거야?!"

세환은 그저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한발짝만 움직여도 사람을 밟을 판국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프리트에 한정되는 제약이었고, 적 로봇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지크프리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멈춰, 이 자식아! 움직이지 마!"

「적 병기가 인류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발언은 무의미합니다.」

"시끄러워!"

그렇게 브룬힐데에게 괜히 화를 내는 사이, 어느새 코앞까지 접근해온 적기가 해머를 휘두르고 있었다. 수평으로 날아오는 해머를 본 세환은 기겁해서 상체를 낮췄다. 몸을 낮춤과 동시에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해머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방패로 막았다간 왼팔이 방패째로 고철이 될 듯한 기세였다.

"젠장, 제대로 한대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리겠는데... 우악!"

피했다고 방심한 순간, 해머를 휘두른 원심력을 이용해 날아온 적기의 발차기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지크프리가 쓰러졌다. 다행히 지크프리트가 넘어진 곳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텅 빈 곳이어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세환은 쓰러지는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아직 일러도 너무 일렀다. 사람이 없었던 것을 확인하고 위를 쳐다보자 적기가 자기 머리 위로 해머를 쳐들고는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해머가 내리꽂히는 순간, 세환은 메인 스러스터를 켜고 적기를 향해 돌진했다. 위로 피할 수는 없고, 옆으로 피했다간 스러스터의 분사 압력 때문에 사람들이 날려갈 위험이 컸기 때문에 차라리 달려드는 편이 나았다.
적기를 껴안듯이 달라붙은 세환은 그 직후에야 자신도 장검을 휘두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건 더 안 될 말이었기에 잠시 머리를 굴리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에 끔찍한 통증이 몰려왔다.

"크아악!"

고통스러워 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해머의 손잡이 끝부분이 왼쪽 어깨를 뚫고 들어와 있었다. 해머 손잡이 끝에 송곳 같은 침이 달려있었던 것이다. 적기는 해머를 좌우로 돌려가며 손잡이를 더 깊숙히 박아넣으려 하고 있었다.

"이 자식이잇!"

세환은 다시 허리를 숙이며 다리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까지 끌어올리자 간신히 발이 적의 동체에 닿았고, 그 순간 세환은 있는 힘껏 적기를 발로 밀어내며 보조 스터스터를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가능한 빨리 거리를 벌렸지만 그 물러나는 잠깐의 시간도 적기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처 해머의 공격범위를 벗어나기 직전, 내리꽂힌 해머에 지크프리트의 왼쪽 어깨가 으스러졌다.

"......!!!!!!"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깨를 붙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주변엔 아직 시민들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이에 다시 다가온 적기가 해머를 휘둘렀고, 세환은 급히 뒤로 몇걸음 물러섰다. 한두걸음 정도의 범위 안에는 사람이 없다고 브룬힐데가 보고했기 때문에 별 걱정없이 물러서서 피했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으로 발차기까지 피해내자, 적기는 아직 남아있는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한번 해머를 휘두르며 접근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해머가 지크프리트의 축 늘어진 왼팔을 박살내며 동체를 가격했다.

"커헉!"

「동체 좌측부 장갑 손상률 70%. 위험합니다.」

브룬힐데의 피해 보고를 듣는 순간, 지크프리트는 이미 지면에 쓰러져 몇 바퀴나 구른 뒤였다. 정신을 수습한 세환은 지금 지크프리트가 있는 장소가 방금 전 서 있던 장소에서 100m가 훨씬 넘게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길한 생각이 든 세환은 서둘러 지크프리트의 동체를 살펴보았고, 지크프리트의 곳곳에 묻은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

붉은 얼룩과 하얀 조각, 그리고 프레스 기기에 눌린 듯한 살점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팔을 앞으로 뻗어 적기를 조준. 팔등에 달린 레일 건 타입의 니들 건(Needle Gun), 전탄 발사. 20발이 순식간에 소모됐다. 명중한 것은 12발, 후반의 8발은 적기의 회피기동 때문에 미스. 니들 건 발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메인 스러스터 전개(全開), 최대 속도로 적기와 충돌했다. 충돌 직전 장검을 수평으로 눕혀 적기의 오른쪽 어깨에 꽂아넣고 손에서 놓았다. 충돌과 동시에 보조 스러스터 역분사, 지크프리트를 정지시켜 비틀거리는 적기와 거리를 약간 벌렸다. 오른 손목 안쪽에 부착되어 있던 단검을 사출시켜 오른손에 쥐었다.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된 적기는 무거운 해머를 휘두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달려들어, 이번엔 단검을 적기의 왼쪽 어깨에 꽂은 다음 비틀어 밀어넣었다. 적기의 왼손이 힘없이 늘어지며 해머 손잡이를 놓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리를 들어 적기의 동체를 걷어찼다. 적기는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이번엔 왼 손목 안쪽의 단검을 뽑아들고 재차 돌격. 그 모습을 본 적기가 스러스터를 켜고 하늘로 솟구쳤다. 다리를 굽혀 땅을 박차며 메인 스러스터 가동. 아래쪽에서 적의 복부를 지크프리트의 부서진 왼쪽 어깨로 들이받았다. 두 기체 모두가 공중에서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잠시 후 적기의 발차기가 지크프리트의 머리 왼편을 강타, 지크프리트가 허공에서 한바퀴 회전했다. 균형을 잡지 않고, 회전하는 힘을 실어 오른팔로 적기의 다리를 후려쳤다. 적기도 허공에서 한바퀴 회전, 머리가 아래를 향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단검을 적기의 목에 꽂아넣었다. 그 상태 그대로 지면으로 내동댕이치며 자신도 지면을 향해 내리꽂혔다. 적기를 밑에 깔고 굉음과 함께 지면에 충돌. 쓰러진 적기의 목에서 단검을 뽑아 명치에 찔러넣었다. 단검을 반바퀴 돌리고 밀어넣고, 반대 방향으로 다시 반바퀴 돌린 다음 한번 더 밀어넣었다. 그제야 적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적기의 동체 위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선 아직도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적기의 오른쪽 어깨에 박혀있는 장검을 뽑아 들고 착륙선에 다가가 에너지 전송장치를 파괴했다. 비명소리가 그쳤지만 아직 할 일이 더 있었다.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
이동하는 동안 세환의 표정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있었지만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브룬힐데는 세환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 날, 베네수엘라의 국회의사당과 대통령 관저는 폐허로 변했다.

세계의 유명 언론은 『외계 로봇,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는가』, 『칼끝을 인류에게 돌린 로봇』 등의 기사를 실었다. 피난 권고가 없었다는 사실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철저한 언론 통제와 대외 로비로 인해 묻혀버렸다. 실제 사실이야 어떻든, 기사의 논조와, 함께 실린 '폐허가 된 대통령 관저 사진'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제 사람들은 지크프리트를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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