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크아악! 이런 X자식!"

「좌완부 파손. 하박 이하 제어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어! 크윽!"




20XX년 4월 XX일 오후 8시 경, 러시아 모스크바.




"크헉! 이이이익!"

「하복부 관통. 행동에 지장 없음.」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지난번까지 안 하더니 갑자기 정신 사납게... 우와앗?!"




세환은 크레믈린 궁 앞에서 적과 전투 중이었다.
이번의 적기는 양 팔등에 검날을 장비한, 완전 검격 전용이었다. 온몸에 스러스터로 도배를 했는지, 운동성이 장난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크프리트는 이곳저곳이 금이 가고 꿰뚫리고 찢어져 있었다. 게다가 주변은 러시아 군대가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했다.




"어느 쪽이 이기든 그냥은 안 보내겠다는 것 같잖아... 큭!"

「우완 상박 파손. 전투 속행 가능.」




지난번 런던 전투에서 넬슨 탑과 런던 국립 미술관이 파괴된 이후로, 지크프리트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상당히 안 좋아져 있었다. 좀 잘 싸웠으면 그런 피해는 없었을 거라는 의견은 준수한 편이었고, 심한 경우에는 지크프리트 때문에 외계 로봇이 쳐들어오는 게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그 경우에는 첫번째 적기의 경우로 반론하면 잠잠해지긴 했지만, 세환으로서는 기분이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덕분에 지금도 크레믈린 궁이 부서질까봐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젠장, 성질나는데 그냥 신경쓰지 말고 확 난리쳐 버릴까..."

「후방 접근!」

"으이익!!"




세환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 전투 상황은 모두 기록되고 있었다. 사실 지난번 샌프란시스코나 런던에서도 생중계 되었으니 별로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총력을 기울여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달랐다. 약간의 단서라도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스파이 위성까지 동원해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억, 허억... 겨, 겨우 이겼다... 제길, 수리하려면 한참 걸리겠군."

「절단된 왼팔을 접합하는데 약 20일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알았어, 저 로스케 동무들이 뭔 짓 하기 전에 빨리 마저 부수고 도망치자."

「알겠습니다.」




《그래도 살아간다》 - 3. 피해갈 수 없다




벌써 세번째 전투를 경험했지만, 세환은 아직까지 나노머신이 신경계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각 증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도 아니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말이 어눌해지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침식 증상이 늦게 나타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나중에 몰아서 한번에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아닌지 세환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직 마스터가 자각할 수 있을만큼 진행되지 않은 것뿐입니다. 접속할 때마다 나노머신이 신경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또한 증상이 없다가 일순간에 중증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증상을 자각한 이후로 진행속도가 빨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희망을 갖고 물어봤는데 참 간단하게도 부정해버리는구나."

잠자리에 누운 세환은 브룬힐데의 대답을 듣고 투덜거렸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가 조금 안 된 시각. 전투에서 돌아온 후 땀에 젖은 몸을 씻다보니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아, 그런데 설마 호흡기 계통부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그럼 증상 심화고 뭐고 없이 끝이라고."

「신경 침식에 의한 손상은 수의근, 대체로 사지부터 시작되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통각 신경의 이상을 가장 먼저 자각한 경우도 있습니다마 호흡기 신경의 손상이 나타난 사례는 없습니다.」

"그래? 그거 다행이네."

세환은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언젠가 증상이 나타나리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좀처럼 그 시기가 오지를 않으니 도리어 초조했다. 아예 이대로 증상없이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 리도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일찍 증상이 나타나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정말로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아, 그러고보니까 이번 전투 내내 피해보고를 하던데, 지난번까지는 안 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정신 사납다고."

「마스터는 기체 손상을 너무 돌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손상이 누적될 경우 예상치 못한 행동 장애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경고 차원에서 보고하는 것입니다. 마스터께서 조금 더 기체 상태에 신경을 쓰면서 전투에 임하신다면 손상 보고는 생략할 예정입니다.」

"...아, 네."

브룬힐데의 질책에 가까운 말에 세환은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전투를 하다보면 머리에 열이 올라 다치든 말든 달려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저 앞으로는 주의하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이나 자자."




"오늘 아침 뉴스 봤냐? 모스크바에 나타났다는 거."

"봤어. 크레믈린 궁이 아주 초토화 됐더라."

"맞아, 그것 때문에 지금 역사학자나 그런 사람들이 아주 난리법석인 모양이더라?"

"먼저 살고나서 문화가 있는 거 아닐까.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야, 그런 사람들 보면."

점심 시간, 세환은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당연하게도 오늘 새벽-한국 시간 기준-에 있었던 모스크바 전투였다. 세환으로서는 된통 두들겨맞고 크레믈린 궁 박살내고, 고생만 잔뜩 한 기억이 남아있어서 내키지 않는 대화였지만 진석과 민우에게 내색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얌전히 듣고 있었다.

"그러고보니까, 묘하게 현지가 밤일 때만 떨어지는 것 같지 않아?"

"그건 그렇네. 하지만 우연 아닐까? 꼭 노리고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잖아."

"하지만 우연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 것도 좀 이상하잖아. 진짜 노린 거 아닐까?"

"알렉산드리아도 있어. 그 때가 최초였고, 낙하한 것도 낮이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낮이었다고."

"...그랬나?"

그때까지 진석과 민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환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진석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저기, 그런데 말이야.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처음 낙하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공격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움직였잖아.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때 부터는 낙하하자마자 바로 나와서 공격 시작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낙하 시간대가 다른 것도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세환의 말에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처음에 이상한 방송 같은 걸 했지.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그런 게 전혀 없이 바로 공격을 시작했어. 그러면 알렉산드리아는 선전포고였기 때문에 대놓고 움직였나? 그 후부터는 본격적인 전투라서 밤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아니, 그런데 그 덩치들을 봐서는 도저히 기습의 효과를 누릴 수 없을 것 같은데..."

"기습이 아니라 혼란을 조장하는 게 목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오호라, 그런 수도 있었구나. ...보통 혼란은 본 작전의 성공을 위한 수단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면 본대가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되잖아. 그게 사실이라면 인류에겐 미래가 없구나."

세환은 순간 움찔했다. 말해도 괜찮을 듯한 정보 몇개만 꺼냈을 뿐인데 민우는 순식간에 배후의 존재까지 추리해낸 것이다. 몇마디 잘못 꺼냈다간 정말 완전히 들통날 것 같아서, 세환은 민우에게 말을 할 때에는 조심하자고 다시금 다짐했다. 잠시동안이었지만 카라타스보다 민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음,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추리해낼 정도라면 미국 국방부 같은 곳에서도 검토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 아닐까? 어떻게든 대책이 생기겠지."

"...넌 지금까지 도시 네 곳이 초토화된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게다가 그 중 한 곳은 그 미국 영토라고."

"아니, 하지만 비밀 병기 제작이라든가, 그런 걸 지금 진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비밀 병기에 매달리는 건 패전의 지름길이다. 명심해."

낙관론을 꺼냈다가 민우의 반박에 찍 소리도 못하고 깨진 진석이었지만, 이번만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번에 런던에서 회수한 URG-04의 잔해입니다."

"이 녀석인가... 그런데, URG라는 건 무슨 약자요?"

"미확인 로봇 거인형(Unidentified Robot : Giant)이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여, 함께 출현하는 거미형 로봇은 미확인 로봇 거미형(Unidentified Robot : Spider)이라는 의미로 URS라는 식별번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계속하시오."

"알겠습니다."


20XX년 4월 29일 새벽1시.
버지니아 주 미국 국방성 지하, 비밀 회의실.

미국에서는 그동안 외교 협상과 은밀한 루트를 이용해 지크프리트에게 파괴된 카라타스의 거대 병기의 잔해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대응책 수립을 위해서 전담 연구반과 대책반까지 편성한 이후 회의가 몇차례 열렸지만 마땅한 대응책과 연구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알렉산드리아에 출현했던 URG-01, 이것이 샌프란시스코에 출현했던 URG-02와 URG-03, 이것이 런던에 출현했던 URG-04, 이것이 모스크바에 출현했던 URG-05입니다. 이중 URG-03과 URG-05는 자세한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URG-03은 매번 파괴되지 않고 도주했기 때문이고, URG-05는 러시아 측에서 잔해 인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꽉 막힌 불곰 놈들 같으니. 순순히 넘겨주면 서로 편하고 좋을텐데... 아, 혼잣말이오. 계속하시오."

슬라이드에는 지금까지 지구에 나타났던 카라타스의 거대 병기들과 지크프리트가 비춰지고 있었다. 그 중 URG-03이라는 식별번호의 로봇이 바로 지크프리트였다. 세환이나 브룬힐데로서는 억울한 노릇이지만, 인류로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으니 그냥 거대 로봇이라는 묶음 아래 모아버린 상황이었다.

"URG-01은 핵공격에 의해 오염되고 또한 그 고열로 상당히 손상되었기 때문에 연구에 장애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회수한 이후 분석조차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슬라이드 화면 옆에는 50대쯤으로 보이는, 부스스한 흰 머리의 한 과학자가 정부 고관들에게 설명을 하고 있었다. 복장이 흰 가운이 아니라 트레이닝 복이라는 점 때문에 잠시 산책나온 옆집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래도 미국 메카트로닉스의 일인자였다. 회의실에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요인들은 눈앞의 과학자를 업신여기지 않기 위해 그 점을 자꾸만 속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분석을 진행할 수 없었다니, 오염 문제 때문이오?"

"그것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샘플 분석이 불가능했습니다."

과학자의 대답에 요인들은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과학자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부연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일단 장갑재의 재질을 알아보기 위해서, 또한 내부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외부 장갑을 절단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절단해낸 조각으로 여러 실험을 하면서 장갑재질을 파악하고, 또 절단한 부위를 통해 내부 구조를 들여다 볼 수 있으니까요."

거기까지 설명하고나서야 고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기색을 보였고, 과학자는 '매번 이렇게 덧붙여야 하나'하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설명을 이었다.

"그런데, URG-01의 장갑재는 애초에 조각을 내는 것부터 불가능했습니다. 기본적인 절단 공구부터 워터 제트까지 동원했는데도 흠집조차 안 나더군요. 결국 실험중인 레이저 절단기를 이용해 48시간동안 절단 작업을 벌인 끝에 손톱만한 크기를 간신히 잘라낼 수 있었습니다. 대신 레이저 절단기는 과열되는 바람에 폐기처분 됐죠. 여기까지만 해도 기가 찬데, 이게 또 현재 우리가 가진 어떤 분석 기법을 동원해도 결과가 안 나오는 겁니다. 모조리 '데이터 없음'으로 뜨니 환장할 노릇이더군요. 덕분에 지금 연구원들은 의욕이 완전히 꺾여 있습니다."

"그 데이터가 없다는 말은, 미지의 금속이라는 말이오?"

"미지의 금속이기도 하지만, 분석 방식조차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어,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신석기 시대의 인간이 티타늄이나 두랄루민을 마주한 격이라고 할까요? 뭔가 엄청난 물건이라는 건 알지만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설명을 들은 요인들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들 있었다. 물론 거대 병기에 적용된 기술이 인류가 현재 보유한 기술보다 현저하게 뛰어난 것이리라는 짐작은 이미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날 줄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막연히 '저 기술들을 분석해낸다면 거대 병기를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그 생각은 희망적인 게 아니라 망상의 수준이라는 얘기였다. 그렇게 다들 꿈도 희망도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듣고만 있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부 구조는 어떻소? 외부 장갑은 그렇다 쳐도 내부 구조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소득이 있을 텐데."

대통령의 말에 축 늘어져 있던 요인들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과학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내부 구조도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장갑재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서요, URG-01을 통해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중지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입수된 것이 URG-02입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앞에 설치된 콘솔을 조작해 화면을 넘겼다. 바뀐 화면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격파된 거대 로봇과 지크프리트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URG -02가 활동을 개시한 직후 또 한 대의 미확인 로봇이 출현하여 교전을 벌였고, 이 로봇에는 URG-03이라는 식별 번호를 부여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URG-03은 URG-02를 파괴한 후 도주했습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원리를 규명중입니다만 자료가 너무 부족해 애를 먹고 있습니다."

과학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콘솔을 조작했다. 화면이 바뀌며 URG-02로 명명된 로봇의 분석도 같은 영상이 나타났다.

"URG -02는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회수되었습니다. URG-03과의 전투로 복부가 우그러든 것과 허리부분에서 절단된 것 외에는 손상이 없다시피 합니다. 허리가 잘렸기 때문에 장갑을 절단하는 작업이 필요없어졌고, 그 덕에 동체 내부의 분석은 현재 진행중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이것이 문제의 URG-03입니다."

화면에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가장 의문에 싸인 것이 바로 이 녀석입니다. 목적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원리도, 파일럿이 있는지도 불명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관찰된 행동 양식으로 판단해보면 다른 URG와 적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지난번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공군에게 공격을 받고도 반격하지 않고 도주한 것을 보면 인류에 대한 적대감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요. 저 로봇들에 대한 설명이나 계속해주시오."

과학자는 조심스럽게 지크프리트가 아군일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회의실에 있던 각료 중 한명이 단칼에 말을 잘라버리고는 설명을 재촉했다. 과학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이었다.

"예, 그러면 계속하겠습니다. 일단 외형은 중세 기사의 모습에 가깝고, 무장은 장검과 방패, 단검 네자루가 전부인 듯 합니다. 적어도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URG-02와의 첫 대면에서 URG-02가 발사한 광학 병기로 보이는 공격을 도중에 무효화시킨 것으로 보아, 에너지 병기에 대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너지 방어막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일단 주요 특징은 이 정도입니다. 그러면 다음..."

이번에는 런던에서 파괴된 적 기체가 화면에 비춰졌다.

"런던에서 회수된 URG-04입니다. 양팔과 허리가 절단되었습니다만, 연구반으로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장갑을 절단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 절단 부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연구가 진척된다는 묘한 상황이라서요. 그리고 URG-02와 URG-04를 분석한 결과, 상당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화면을 조작하자 이번에는 두 기체가 지크프리트의 검에 의해 절단된 면이 비춰졌다. 그 단면은 무언가가 촘촘히 채워져있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부 구조 때문에 연구원들이 한때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만, 일단 이 단면을 메우고 있는 것들은 인공 근육일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인공 근육? 그렇다면 저 로봇들은 모터나 그런 걸로 관절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처럼 근육에 의해서 움직인단 말이오?"

"예상이긴 합니다만, 그렇습니다."

회의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요인들에게 전문 지식이 없다고 해도 모터와 인공 근육, 둘 중 어느쪽이 더 고도의 기술이 투입된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대통령이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저 인공 근육을 재현할 수 있소?"

대통령의 물음에 과학자는 웃음을 띠었다. 난처한 듯 보이기도 하고, 재미있어하는 듯 보이기도 하는 미묘한 미소였다.




20XX년 5월초의 어느 날 새벽 1시경, 이탈리아 로마.

난데없이 도시에 울려퍼지는 사이렌에 모든 시민들이 잠을 깼다. 다들 영문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로마 경찰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한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잠시 후 경고 방송을 배경음으로 삼아 카라타스의 착륙선이 로마에 낙하했다.




약 30분전 - 같은 날 오전 8시 30분경, 대한민국 서울.

「마스터, 일어나십시오.」

"......"

「마스터, 적이 나타났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마스터.」

".........쿠울..."

「마스터!」

"?!"

세환은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려퍼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전철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학교 가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 잠시 조는데 브룬힐데의 목소리에 놀라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다.
세환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눈을 감고 다시 조는 척하면서 브룬힐데에게 말을 걸었다.

'뭐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무슨 일이야?'

「로마에 카라타스가 낙하할 예정입니다.」

'...지금?'

「낙하 예상 시각은 지금부터 30분 후 입니다.」

'젠장, 오늘 첫 수업은 땡땡이냐...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세환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철은 마침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는 참이었고, 세환은 서둘러 전철에서 내려 화장실로 향했다.

'냄새는 좀 나지만, 들키지 않으려면 여기가 제일 낫지.'

잠시 후, 지크프리트의 콕핏에서 세환은 출격 준비를 하며 브룬힐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혹시 무기 같은 거 추가로 달 수도 있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장비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런던에서도 그랬고, 모스크바에서도 그랬고, 저쪽에 원거리 공격 장비가 있거나 움직임이 빠르면 검이랑 방패밖에 없는 우리가 불리하잖아."

「고려해보겠습니다. 다만 사용된 발사체를 전투 종료 후에 마스터께서 직접 회수해야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주워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콕핏으로 워프하는 것처럼 자동 워프 기능을 넣을 수는 없어?"

「마스터의 워프는 체내의 나노머신이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분의 나노머신은 없습니다. 또한 워프 장비를 내장할 경우 발사 및 명중시 발생하는 충격으로 오작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네에, 그러십니까."

세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전투가 끝난 후 이리저리 발사체를 찾아 돌아다니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이건 완전히 코미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현재 지크프리트의 무장은 전투에 불리한 면이 너무 많았다.

"할 수 없지. 나중에 직접 회수하러 돌아다녀도 상관없으니 준비 좀 해줘."

「알겠습니다. 착륙선 낙하 완료 확인. 지금 이동합니다.」




"이봐요, 거기서 뭐해요! 얼른 저쪽으로 피해요!"

"경찰 양반, 저것 봐요. 저거 열리는데? 안에서 또 뭔가 나오는 거 아뇨?"

"네? ...이런 젠장, 빨리 빨리 움직여요! 시간 없어요! 여기 있다간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이번엔 제법 대피가 이뤄지고 있네. 하지만 알아차리는 게 이렇게 늦어서야 소용이 없잖아..."

「적기가 나옵니다.」

"이제 나오나, 어디 이번엔 어떤 모습일......어라?"

착륙선에서 나오는 적 병기를 본 세환은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봤던 로봇들은 대부분 인간형, 혹은 인간에 가까운 형태였던 것에 비해 이번의 적은 너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둥글고 굵은 동체, 동체 양편에 나 있는 수많은 짤막한 다리, 머리로 보이는 부분 위쪽으로 삐죽 튀어나온 두개의 가닥, 게다가 그 움직임까지 마치...

"...애벌레냐?"

어딘가 맥 빠지게 들리는 목소리. 생김새부터가 긴장감과는 거리가 먼 덕분에 세환은 기분이 영 이상했다. 거대 애벌레를 상대로 검과 방패를 들고 달려드는 중세 기사의 모습이라니. 차라리 풍차에 돌격한 돈키호테가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스터!」

"크헉!"

방심한 대가는 제법 컸다. 애벌레를 닮은 적기는 그대로 몸을 말더니 그야말로 대형 타이어가 되어 돌격, 지크프리트와 정면충돌한 것으로도 모자라 깔아뭉개기까지 한 것이다.

"이, 이 놈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중량 때문에 숨조차 편히 쉴 수 없게 된 세환은 다급하게 적기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어느새 적기는 말았던 몸을 펴서 지크프리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덮고 있었다. 한손에 장검을 쥐고 다른 쪽 팔에는 방패를 고정한 지크프리트로서는 떼어내는 것이 어려웠는데, 게다가 그 짧고 수많은 다리를 이용해 지크프리트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으윽... 이...이 자시익!"

「두부와 동체의 측면, 흉부에 가해지는 부분적 압력이 한계치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장갑이 파손됩니다.」

일단 지크프리트의 검을 휘둘러 내리쳐봤지만,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휘두르는 것이다보니 힘이 충분히 실리지 않아서 튕겨나올 뿐이었다. 찌르기 역시 검날이 길어서 제대로 위력을 낼 수 없었다. 사격형 병기의 필요성이 정말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순 없지잇!!"

세환은 장검을 놓고는 허리 뒤편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팔이 지면 위에서 움직이다보니 건물이 자꾸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단검을 오른손으로 거꾸로 쥔 세환은 다시 한번 팔을 크게 휘둘러 있는 힘껏 적기에 내리 꽂았다.

"저리 비켜엇!!"

꽂자마자 뽑아들어 다시 찌를 생각이었지만, 적기가 재빠르게 몸을 피하는 바람에 단검을 놓쳐버렸다. 그래도 압사당하는 상황만은 면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환은 내려놓았던 장검을 다시 집어들었다. 적기는 100m가 넘는 거리에서 단검을 몸에 꽂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김새 때문에 우습게 봤더니 이거 장난이 아니구만... 브룬힐데, 손상 정도는 어때?"

「적기의 조이기 공격으로 흉부 정면 및 두부와 복부 좌우측 측면, 총 18곳이 함몰. 장갑이 관통되지는 않았습니다만 해당 부위의 방어력은 이제 기대할 수 없습니다. 행동에 지장이 되는 손상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자 그럼... 우왓?!"

자세를 잡고 달려들려던 세환은 적기가 몸을 곧추 세우고 머리를 앞뒤로 크게 흔드는 것을 보고 황급히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 행동이 마치 입에서 무언가를 내쏘기 위한 예비동작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앙 하는 금속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방패를 통해 전신에 전해졌다.

"정말 별 장비를 다 갖... 뭐야, 이건!"

푸념 섞인 소리를 하려던 세환은 방패를, 정확히는 방패 안쪽을 보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송곳 같은 금속침이 방패를 반쯤 뚫고 박혀 있었던 것이다. 전에 다트를 쏘던 녀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위력이었다.

「피격될 경우 지크프리트의 동체를 완전히 관통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도대체 저 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이야!!"

다시금 적기가 금속침을 내쏘려 하자 세환은 다시 방패를 들어올리며 급히 옆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적기는 머리를 앞으로 힘차게 휘두르면서 그 방향을 지크프리트가 피한 쪽으로 틀었고, 세환은 비명을 지르며 방패 뒤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젠장. 뭐야, 저 놈은!"

방패에 가해지는 세 번의 충격. 방패를 내리려던 세환은 왼팔에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돌렸고, 한발이 방패를 뚫고 왼팔마저 뚫고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젠 방패를 떼어 날리는 변칙 공격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들자 적기가 다시 몸을 둥글게 말고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두 번은 안 당해!"

미리 피하면 계속 방향을 바꿔 달려들 것을 우려해 보조 스러스터를 이용, 충돌 직전에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와 함께 검을 휘둘러 베려 했지만, 뜻밖에도 녀석이 지크프리트 쪽으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몸은 여전히 둥글게 말고 있어서 커다란 솥뚜껑 같은 것에 눌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흉부 및 하반신에 강한 충격 발생. 다리 관절에 가해진 충격으로 운동 능력이 약 15% 감소하였습니다.」

"젠장... 이번에 이기면 반드시 사격 병기 달고 만다!"

세환은 이를 갈 듯이 외치며 장검을 놓고 단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허리 뒷쪽으로 향한 오른손은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그제야 세환은 단검이 녀석의 몸에 꽂힌 채라는 걸 깨달았다. 남은 단검은 왼팔에 달린 방패 안쪽과 왼쪽 허리 뒷편에 있어서 지금으로썬 뽑아들 방법이 없었고, 녀석에게 꽂힌 단검도 세환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세환이 다시 장검을 쥐려는 순간 적기는 동체의 측면, 지금은 지크프리트와 맞닿아 있는 방향의 스러스터를 작동시켜 공중에 몸을 띄우더니 반대쪽 스러스터의 추력을 이용해 지크프리트를 향해 내리꽂혔다. 세환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그 낙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천둥같은 굉음, 지진을 방불케하는 진동과 함께 지크프리트의 사지가 들썩였다.

"크헉!"

「동체 전신에 장갑 한계치를 넘는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전체 방어능력 약 30% 하락, 메인 스러스터 출력 40% 감소.」

브룬힐데의 경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적기는 다시 한번 공중에 떠올랐다가 내리꽂히는 동작을 반복했다. 조금씩이지만 지크프리트가 지면에 파묻히고 있었다.

「동체 방어력 78% 하락, 메인 스러스터 출력 90% 감소. 더 이상의 충격은 위험합니다. 회피하십시오.」

연속으로 가해진 충격 때문에 숨이 막히고 정신마저 흐려진 세환에게 회피는 무리였다. 멍해진 세환의 눈에, 끝장을 내려는 듯 최대 출력으로 내리꽂히는 적기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세환의 머릿속에 TV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날이 위로 가도록 일본도를 놓고 사과를 위에서 떨어트려 베어지는 모습을 방영한 프로그램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세환은 재빨리 왼팔을 움직여 지크프리트의 동체를 가림과 동시에 오른손의 검을 방패 앞에 가로로 댔다. 날을 위로, 적기를 향하게 한 채로. 동작이 완료되는 것과 동시에 적기가 지크프리트와 격돌했다.

굉음과 진동, 날아오르는 흙먼지,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카라타스의 병기도, 지크프리트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두 대의 병기를 배경으로 삼아, 거미를 닮은 소형 로봇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경찰과 군인이 동원되어 필사적으로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 로봇들의 위력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에서 충분히 확인되었기에 무력하기 그지 없었다.
잠시 후, 금속이 서로 부딪쳐 긁히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거대 병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은 엉망진창으로 찌그러지고 뚫리고 찢어진 지크프리트였다. 몇번의 충돌로 완전히 일그러진 동체와 방패, 움직일 때마다 끼기긱 소리를 내는 다리, 관자놀이와 목 옆부분이 눈에 띄게 함몰된 머리. 게다가 왼팔을 뚫고 삐져나온 금속침이 방패로 몸을 가릴 때 복부에 구멍까지 뚫었다. 장검은 여전히 적 병기의 동체에 길게 박혀있는 채였다.

"큭... 정말, 엉망으로 당했군... 아직도 어지러운데."

「동체 장갑 손상률 100% 초과. 이후 충격은 고스란히 내부 기기에 전해집니다. 또한 하반신 관절의 충격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 이상의 전투 행동은 사실상 불가능하니 주의해주십시오.」

"알았어, 그럼 일단 마무리를 해볼까..."

세환은 방패 안쪽에 달린 단검 중 한 자루를 뽑아 적 병기에 다가갔다. 녀석은 아직 완전히 정지하지 않은 채 다리와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몸을 길게 파고든 지크프리트의 장검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세환은 녀석을 바라보며 브룬힐데에게 말했다.

"혹시 이 녀석의 에너지 수신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어?"

「에너지 전달 분석 시작합니다. ───────분석 완료. 머리와 동체의 연결부입니다. 애벌레로 보았을 때 첫번째 마디 부분입니다.」

"알았어, 고마워."

말을 마친 세환은 녀석의 에너지 수신 장치를 향해 단검을 힘껏 내리꽂았다.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어 몇번 더 내리쳐서 아예 절단시켜 놓은 다음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적 병기가 완전히 동작을 멈춘 것을 확인한 세환은 장검을 뽑아 들고는 착륙선으로 향했다. 주변에는 아직도 거미형 소형 로봇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고, 그걸 막기 위해서는 착륙선의 에너지 전송 장치를 부수는 게 가장 손쉽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끼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세환은 지크프리트를 움직여 크게 검을 휘둘러 착륙선을 베어냈다. 전에는 거의 두동강을 내다시피 했을 동작이었지만 지금은 2/3 정도 파고드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에너지 전송 장치를 부수는 데에는 충분했는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하아... 겨우 끝났네. 돌아가자."

「잠시만, 마스터. 적의 몸에 꽂힌 단검을 회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기의 머리 부분도 회수해주십시오.」

"응? 그건 또 왜?"

「사출 장치를 분석해서 사격 병기를 제작하는데 참고할 예정입니다.」

"아아, 그래... 그러면 꼭 필요하지."

마침 에너지 수신 장치를 부술 때 머리를 절단해 놓았기에 별도의 작업을 할 필요는 없었다. 왼손에 장검을 옮겨 쥐고, 오른손으로 적기의 머리를 집어들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격납고로 돌아온 것이다.

「귀환 완료. 신경 접속을 해제합니다.」

브룬힐데의 말과 함께 시야가 전환되었다. 세환은 극도의 피로감에 몸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숨을 내쉬며 고정구를 풀어내는데, 느닷없이 왼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뭐, 뭐야? 왜 이래?"

당황한 세환은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아 눌렀지만 떨림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몇분이 지나자 겨우 떨림이 사라졌고, 세환은 조심스레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해봤다. 그러다 주먹이 완전히 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먹의 형상은 만들 수 있지만 그 이상의 힘을 주어 꽉 쥐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거... 그건가?"

「신경 접속에 의한 부작용 현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초의 자각 증상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

세환은 조용히 대답하며 고정구를 풀어갔다. 마지막 고정구를 다 풀고도 세환은 파일럿 시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계속 앉아있자 브룬힐데가 말을 걸어왔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냥, 내가 말할 때까지 내버려둬. 잠깐 조용히 있고 싶어서 그래..."

세환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떨림이 묻어있었고, 그것을 감지한 브룬힐데는 그대로 침묵하고 지크프리트의 수리와 무장 개발 작업도 잠시 미루었다. 완전히 적막에 휩싸인 지크프리트의 콕핏 안에서, 세환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아는 것은 세환 자신과 브룬힐데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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