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tic Blue Hole

"헉... 헉... 헉..."

겨울이 다가오면서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 산 기슭을 타고 뛰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얼룩 무늬 옷과 복합재 헬맷, 검은색 전투화, 몸에 두른 탄띠와 손에 들린 소총.

군인이었다.

그 시각, 산 아래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서 포위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얗고 검은 색의 옷, 손에 들린 것은 붉은 술이 달린 창.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지휘관은 투구와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알겠느냐! 역도(逆徒)는 이 산으로 들어갔다! 반드시 목을 쳐야 할 것이다! 양이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놈들이니 절대로 손속을 두어선 안 될 것이야!"



2008년 어느 날, 해외 평화 유지 활동차 파병되어 있던 대한민국 육군 보병 부대 중 1개 중대가 귀국하던 중이었다.
인천 국제 공항의 관제권에 들어서려는 순간, 알 수 없는 구름과 난기류에 휩싸인 수송기는 관제탑과의 교신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항로를 이탈하여 농촌에 불시착한다.
다행히 피해는 많지 않았지만 비전투 손실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휘관에게 있어서는 문책감이었다. 어쨌든 상부와 연락을 해보려했지만 무전기는 불시착 충격으로 부서졌고, 지휘관과 일부 병사가 민가를 찾으러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본 것은 초가집이 옹기 종기 모인 마을과 한복을 입고 상투를 튼 남자들, 비녀를 꽂거나 댕기머리를 한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도깨비들이 나타났다는 백성들의 보고에 조선의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 보는 이상한 복장과 장비, 우리말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말투는 조선 사람들에게 충분히 도깨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고종은 시대를 거슬러 온 군인들의 장비와 호소에 설득되어 조선의 자주화, 제국화를 선언하려 한다.

하지만......



"중대장님! 일본군과 러시아군입니다! 완전 무장한 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아주 무덤 자리를 찾아오는 구나. 다 쓸어버려!"

기득권 상실을 두려워한 조정 신료들은 각자 자신들과 연줄이 닿는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조선시대로 넘어온 현대군은 그 시대의 외국군대들과 연이은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일본군과 러시아군, 영국군, 프랑스군까지 동원된 연속 전투에서 현대군은 매번 승리했고, 조선이 세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것이 현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연속전투에서 현대군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탄약이 바닥난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탄약으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대군은 외세와 손을 잡은 신료들의 저택을 습격하여 그들을 붙잡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작전이 시행되자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가 발생한다.
외국 군대와 신료들에게 협박당한 고종이, 현대군을 반역도로 선포한 것이다.

'양이의 문물을 이용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과인의 눈을 어둡게 하였다. 또한 과인의 충신들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무단으로 군사를 움직였으니 이는 반역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아무리 개개인의 전투능력과 장비가 뛰어나고 숫자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이고, 탄약도 바닥난 상황에서 현대군의 저항은 불가능했다.
결국 현대군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하기 시작하지만, 조선 반도 내에서 그들이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선 말투와 복장이 너무 튀었다. 게다가 이미 역도로 규정된 상황이라 모든 조선 백성들이 이들을 적대시했다.

병사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우습지도 않은 풍토병, 산 기슭 이곳 저곳에 놓여있는 덫, 쉴새없이 쫓아오는 조선군과 외국군.
현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지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사라진지 오래였다.
조상이자 동족들에게 쫓기는 현실, 원시적이라고 생각하던 검과 활과 창에 죽는 동료들의 모습, 조선 조정과 신하들에 대한 배신감이 현대군을 절망으로 몰고 갔다.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간 어느 날, 현대군은 조선군과 외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는다.
탄약은 바닥나고, 사기와 몸 상태도 엉망인 상황에서 대포까지 동원된 토벌군의 공격에 현대군은 괴멸당한다.
살아남은 사람은 십여명, 그나마도 이곳 저곳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간신히 산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쫓아 외국군은 빠르게 산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뒤이어 조선군도 수색을 시작했다.

도주에 성공한 현대군인들도 기아와 추위로 하나둘씩 숨을 거두고, 이제 단 한명만이 살아남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나긴 도주도 이제 끝나려 하고 있었다.



병사는 산 중턱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며칠동안 먹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산기슭을 오랜 시간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병사는 눈물을 흘렸다.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008년에 부대 철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그 날밤을 꼬박 세웠다.
처음 이 시대로 떨어진 날은 당황하고 두려웠다. 그런 상태에서 중대장이 '역사를 바꾸자!'고 했을 때, 뭔가 가슴 속에서 울컥 하는 느낌이 들었다. 슬프고 어두운 역사를 지우고 밝고 희망찬 세계를 만들자는 생각에 모두가 환호하며 중대장을 따랐다.
외국 군대들과의 쉴 새 없는 전투. 그 전투가 끝날 때만 해도 부대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동료들도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았다.
중대장은 며칠전 토벌군과 교전하던 도중 죽었고, 자신도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멀리서 사람들이 접근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그저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우리 민족이, 우리 나라가 슬픈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 뿐인데.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부시럭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토벌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양 군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동족들끼리, 조상과 후손들이 서로 죽이는 상황은 정말 죽고싶을 만큼 싫었다.
토벌군 병사들 뒤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복장과 권총을 보니 지휘관 같았다.

혼자 남은 병사는 눈을 감았다. 그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토벌군 지휘관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권총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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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뭐, 요새...는 아니지만, 근래 들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오는 '현대군 시간 이동물'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떠올라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설들 보면 정말 그 시대 넘어가서 엄청나게 휘젓고 다니면서 연전연승, 승승장구 합니다만, 실제로 조선 후기라면 저런 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죠.
게다가 현대군의 특성상 탄약 보급이 없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현대군 시간 이동물'에서는 소속 부대원 중에 탄약이나 기계 관련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 한두명씩 꼭 있어서 탄약과 총기를 모두 자체 충당합니다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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